7장 5절 전쟁 후 서울의 어릴 적 풍경
1950 년.6 월 25일 일요일
북한 김일성은 그 당시 남로당 당수인 박헌영을 앞세워 남침을 하면서 한국동란을
일으킵니다.
그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한이 거의 다 불타고 파괴되어 초토화 되는 비운을 맞이 합니다.
1960년대는 한국 전쟁 휩쓸고 간 전쟁 후유증의 화마로 인한 피해가 상상을 초월하는 그 폐허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625 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어느 외국인은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필 수 있을까!’라고 악평을 하곤 했지요.
적화통일이라는 미명아래 한반도 내에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지요.
박헌영과 김일성은 역사 속의 전범들입니다.
330만 명이라는 사상자를 낸 아프고도 처절한 전쟁이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전범들이 나오지 않기를 기원할 뿐입니다.
그런 참담한 속에서 하늘엄마는 60년대의 가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한 세월이었습니다..
어릴 적 혜화 국민학교 때 시절이 어렴풋하게 떠오릅니다,
서울 사 대문 안에 있었던 혜화 역 근처 뒤 편에 자리잡고 있었던 동숭동 한옥집 마을, 동네의 좁았던 골목
, 혜화 국민학교로 가던 그 신작로길, 그 혜화동 로터리
분수대. 푸른 뒷동산 낙산, 건너편
이화동과 백동, 동네 교회 건물과 십자가 ,
차임 벨 소리와 한국 전쟁 이후에
태어난 어린이들이 뛰어 놀며 지르던 함성소리 등이 아련히 함께 떠오릅니다.
어린 유년 시절을 떠오를 때마다 느낀 가장 깊은 기억
속의 강한 감정은 매일 혜화 국민 학교에서는 시험을 치르곤 했습니다.
그와 함께 선생님은 말씀은 이어집니다.
“종이 땡땡 울리기 전 까지는 시험지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된다.”’
지금 환갑이 다 지나고 진갑 역시도 흘러 갔지만 국민
학교 때 선생님의 무섭고도 잔인했던 그 음성은 귓가에 계속 맴 돕니다.
인생이라는 시험지 위에다도 일분 일초 까지 줄 곧 눈을
뗄 수 없겠지요.
그 시험지가 이제는 글쓰기 종이로 치환되어 이렇게 춤을
추고 있는 지도 모르겠군요.
지금도 왜 어린 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은 매일 시험지를
나누어 주면서 시험을 보고 채점을 해야만 했는지 이해를 못하겠네요.
그 당시 선생님들은 하늘이었으며 몽둥이를 든 폭력배
조 폭 수준이었습니다.
어린 동심의 시각으로 봐서는…
선생님의 말씀은 법이었고 학교는 헌법 재판소였습니다..
그 당시 국민학교는 복종 이외의 다른 개념은 찾을 수도 없었고 찾아서도 안 되는 무서운 사관학교였지요.
오로지 명문 경기 중고등 학교에 가야만 하는 분위기가
그 당시 국민 학생들에게는 지상명령이었습니다.
그래도 국민학교 시절은 중고등 학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면이 있었다면 그래도 어린 동심이 꽃 필수 있는 낭만의 공간이 약간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동화책이나 위인전을 읽을 수 있는 여건이
허락 되었으며 또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좁은 골목길에서 다방구와 딱지 치기와
축구를 할 수 있었던 정겨운 시간 들이 허락 되었습니다..
교육에 관한 한 지금도 한국의 교육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겠지만…
국민 학교시절부터 입시 지옥에
시달리는 것은 하늘엄마의 시각에서는 거의 질식 수준에 이르곤 했지요.
학교 수업은 워낙 베이비 부머 세대라 오전반이 있었고 오후 반이 있는 2부제 수업을 들어야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3부제로 수업을 진행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게 어린 학생들이 너무 많아 교실이 모자라는 상황이었지요
지금은 인구 절벽 시대라 초등학교가 서울에서도 점점
줄어든다고 하는데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어린 시절 하늘엄마는 병약한 편이었지요.
그래서 잘도 넘어지고 감기에 잘 거리고 편도선 염에도 생겨나 열이 많이 나곤 했지요.
그러나 매일 시행되는 시험시간에는 예외가 있을 수도
없고 몸이 아파도 시험지를 안 받을 수 없는 그런 사관학교 같은 엄격한 불문 율을 지켜야 했던 곳이 어린 시절의 국민학교였지요.
시험지를 앞에 들고 바들 바들 떨던 어린 시절의 동심이 아직도 자라지
못하고 떠나 보내지 못하는 동심의
내면적인 아이는 지금도 마음속 깊이 살아서 웅크리고 있네요.
선생들이 기록한 생활 기록부에는 항상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내성적인 아이로…’
어린 시절에는 선생님들은 그냥 누구에게나 생활기록부는
그렇게 적는 줄 알았지요.
그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들이 흘러가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숱한 시간들이 지나가서야 깨닫게 됩니다..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수줍은 아이는 내면에서만 있고
튼튼하게 자라나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서 내면적인 동굴 안에 반골적인 아이로 깊이 틀어 박혀 있네요.
몸도 자라고 마음도 자란다고 남들은 말하곤 하는데 왜
유독 하늘 엄마의 내면적 아이는 심연에서 웅크리고 앉아 성장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국민학교는 어린아이들의 군대 훈련소였고 그곳에서
배우는 선생님의 가르침은 엄한 훈련입니다..
한번은 국민학교에 갓 들어가서는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
그리고 수줍어서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의자에서
대변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질러 버렸지요
열에 있던 아이들이 ‘야, 여기서 똥 냄새가 나…”
선생님도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하교하면서 똥 덩어리를 떨어 뜨리기도 하면서
집으로 들어가서 엄마에게 이실직고 하니
예쁘게 한복으로 갈아 입고 외출 하시고자 했던 어머니께서는 화를 내시며 “왜 선생님께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말하지
않았어?” 라고 꾸중을 합니다.
‘그렇게 내가 용기가 있었으면 화장실에 다녀 왔겠지…’
내면의 아이는 다시금 반항심을 키워 갑니다.
그 속에는 이런 풍경도 숨어 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시절 어느 가을날 집으로 귀가하면서 들르던 혜화동
로터리 분수가 옆에 있는 미술학원에서 미술 선생님은 “애야 오늘은 도화지에 이순신 장군을 그려 보아라”
라고 어린 저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케치 실력이 없었던 하늘 엄마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는 그림을 요구한 것이지요.
난감한 마음으로 멍하니 앉아 서양 조각 상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정했던 미술 선생님은 다가와 친절하게도 노란색 색연필을 들고 피카소 저리 가라 수준으로 이순신 장군을 창조해 줍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흰 도화지 외엔 아무것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 없던 백지였건만 선생님의 마술의 손으로 이순신장군이 멋지고 힘차게 살아나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이 마법처럼 펼쳐집니다.
그 다음 색칠하기는 누워서 떡 먹기이지요.
그냥 좋아하는 예쁜 색깔로 즉 빨강색과 노란색 그리고
파랑 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색칠만 하면서 도화지를 메우면 족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미술 학원을 다니기 싫었던 낭만적 생활도 곧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엄격 했던 아버님께서는 그림 그리기에 관심이 없었던
저를 간파해 내시곤 도화지를 검열하게 됩니다..
도화지에는 미술 학원에서 그리다 말곤 도망쳐 나온 여러 그림들이 도화지 안에서 뒹굴며 볼품없이 나딩글고 있었지요.
결론은 뻔한 결말.
“당장 미술 학원 때려 치워!”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지금도 그 덕분에 미술관에 들러 그림들을 감상하곤 합니다..
어린 시절 그림 그리기란 그렇게도 싫었던 미술 수업시간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친근한 벗이 되어 곁으로 다가 옵니다.
만물을 변화듯이 세월 따라 마음도 적성도 취향도 변하나
봅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갑니다.
어린 시절의 악마가 이젠 노년을 바라보는 함께 가는 벗으로 둔갑해 버립니다..
국민학교 시절 써 놓았던 부산 기행문을 여기에다 소개해
봅니다..
그 당시에 썼던 그대로를 적어 보겠습니다.
중학교 1학년
작문 시간에 작문 선생님의 숙제로 인해 만든 문집에서 수록된 유일한 국민학교 부산 여행기 기록물입니다.
‘부산에서
내가 5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형과 누나들과 같이 부산에 가서 놀았다.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있다.
1968년 8월 3일 맑음 아침이었다.
마음에 들뜬 나는 아침밥을 드는둥 마는둥 하고 갈 준비를
차렸다
그때의 기분이야 말로 이루 비길 때 없었다.
시간은 흘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다음 서울역으로 가서
차표를 사고 나서 맹호 열차에 올랐다
약 20분
동안을 기다리니 열차가 발동을 걸면서 천천히 가기 시작 했다.
창문을 보니 하늘 높이 전봇대가 연달아 뒤로 물로 섰다.
약 10분
지난 농토가 보였다.
저 끝없는 농토가 한 눈에 보이니 나의 마음을 더한층
기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시간은 흘렀다. 약 3시간 동안 열차 속에 있으니 그 상쾌한 마음은 없어지고 지루한 마음조차 들었다.
내가 탄 맹호 열차는 굴을 지나 강을 건너 부산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열차에서 내려 부산역을 빠져 나오니 임 장로님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임 장로님께서는 우리들을 임 장로님 댁으로 데려다 주셨다.
그 날은 너무 피곤하여 이불 속으로 직행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송도에 갔다.
그런데 송도에는 물이 어떻게나 더러운지 물에 들어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없다.
수영을 하러 왔으면 의례 물에 들어가기 마련이다.
수영을 하여도 재미가 없었다.
집에 돌아 왔어도 피곤은 가시질 않았다.
다음날은 임 장로님 가족과 함께 해운대에 가서 놀았다.
그런데 놀다가 갑자기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돌아 왔다.
다음 날은 다데포에 가서 놀았다.
다데포는 해운대 만큼 물은 깨끗하지 않지만 썰물 때는 50-60m를 나가면 어떤 곳에는 물이 없는 곳도 있고 물이 있는 곳은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다음 날은 태종대에 갔다.
버스를 타고 벼랑 길을 가는데 무서웠다.
태종대에서는 수영을 하지 않고 놀기만 했다.
출렁이는 바다. 막막한
수평선.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나도 이런 곳에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임 장로님과 함께 동북교회 갔었다.
동북교회는 응암공원 옆에 웅장히 서 있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 교회보다 큰 것 같았다.
저녁에는 은암 공원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구경했다.
다음 날은 부산에서 노는 것이 마지막 날이었다.
그런데 나는 설사가 나서 해운대에 가지 못했다.
집에 누워 있자니 따분하고 신경질이 났다.
다음 날은 우리는 차비를 차린 다음 부산역으로 갔다.
기차 간에서 재미있게 놀은 생각을 하니 더 놀다 갔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할 뿐이었다.’
어린 동심의 마음이 잘 녹아 내리고 있군요
그 당시로써는 가장 먼 지방이었고 하늘엄마에게는
베들레헴 같은 태어난 곳이기도 했습니다..
어언 장년의 한 가운데 서 있는 하늘엄마로써는 회한이 넘치는 동심 어린
여행기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