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1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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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절 평양시대
지난 번 7-1에서는 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잠깐 다루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저의 부모님들의 평양 시절의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평양시대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그전에 우리는 평양 땅이 어떤 땅인가를 개괄적으로 조망한 후에 우리 집안의 평양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역사적 순리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 평양 땅에 대한 제 역사 지식을 나열하겠습니다.

지도 책에서 평양을 들여다 보면 평양 땅은 한 가운대로 대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서울이 한 복판으로 한강이 흐르고 있듯이...
중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최초의 우리 민족이 B.C 2333년에 세운 나라인 세운 고조선을 이야기 하면서 그 당시 민중들에게서 구전으로만 전래되어 내려오는 단군왕검 신화를 이야기 합니다
즉 어느 날 환인이 자기 아들 환웅에게 지상으로 내려가 새로운 신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명합니다

그래서 신하 3000명을 이끌고 태백 神市(신시)로 내려와 고조선을 건국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태백 신시가 압록강 근처 도시라는 사람도 있고 평양이라는 사람도 있고 만주의 어느 강가근처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처럼 평양은 유구한 역사와 동북아시아문명의 중심지요 젖줄입니다

인류최초로 4대 문명이 큰 강가에서 일어났듯이 동북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로 대동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 후 BC 2333년에  새워졌던 고조선은 BC108년 중국 한나라에게 멸망 당하는 비운을 맞이합니다 그 다음에 BC1세기 경 고구려 궐 백제 신라 등 많은 동북 아시아 나라들이 세워집니다 처음에는 고구려가 만주 압록강 근처에 있던 졸본 성과 압록강 근처 집안의 국내성에서 수도가 생기지만 광개토 대제 이후 주위 만주 땅을 다 평정시킨 이후에는 장수 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대동강은 상무정신을 충만한 반골의 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결코 명멸하는 중원의 중국 나라들에게 굴복 하지 않고 동북아 패자로써 자기 년호(年號)를 쓰며 천하의 중심처럼 무인정신을 온 천하에 떨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과 마찰 할 수 밖에 없고 중국의 수 나라와 싸워 멸망 시켜 버리고 다음 번에 중국 당나라와 여러 번 싸워 승리하기도 하고 끝내는 멸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발해와 고려와 후 금과 청을 세워 중국과 겨루며 중국을 다시 굴복시켜 청나라를 건설 하기도 합니다

그 중심에 평양의 대동강이 있다고 생각 됩니다. 조금은 역사적 비약이겠지만...

만주로 가기 위해서는 분명히 대동강을 건너야 하고 평양을 지나가야 하기에 숱한 전란의 화마에 휩싸이기도 하고 조선시대에는 유배지의 땅으로 반역의 땅으로 천덕꾸러기의 경계의 땅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좌우간 고려 시대에는 묘청의 난으로 조선조에서는 홍경래 난으로 항상 혁명의 땅으로 인식 되게 됩니다.

지금도 대동강 물은 마시는 평양사람들은 미국의 가시로 여겨지게 되고 중국인들에게는 골치 덩어리로 여겨지는 것과 일맥 상통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랑스런 尙武(상무)反骨(반골)氣槪(기개)의 땅이네요
역사 속에서 선 과 악은 없고
문명 속에서 우열이 없듯이
서로 다름과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럼 우리 가족이야기로 돌아와서
저의 아버지께서는 소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즉 1930년경 신 문물로 근대화의 여명이 밝았던 평양 땅을 밟게 됩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일인들이 많은 상점을 소유했고 우리 나라 정치경제를 쥐락펴락 했겠지요

지금 시각으로 봐서는 그 일본인 밑으로 들어가서 점원 생활을 한다는 것은 치욕적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그 당시 시각으로 봐서는 그렇게 찬밥 더운 밥을 가릴 게재가 못 되었을 것으로 가난의 절박함이 묻어 있는 고난의  일제 강점기였습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삼성이나 현대 사원으로 들어간 것으로 치환해서 생각한다면 무난하리라 사료됩니다.
아마도 평양시내는 그 당시 할머님과 아버지 등 시골 사람에게서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휘황찬란한 전기 빛이 들어 오는  평양의 밤거리는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인맥을 통해서 근처 일인 상점에 취직되어 할머님을 모시고 평양 어느 변두리 구석 단칸방을 구하고 평양 생활을 시작 했습니다.
평안 남도 성천군에서 자란 아버지는 시골과 대도시 평양은 하늘과 땅 차이 만큼 신천지였고 청운의 꿈을 키우기에는 벅차고 안성맞춤의 도시였으며 피 끓는 청춘에게는 청년 드림의 땅이었지요.
월급은 일인 상점 주인들에게 받은 쥐꼬리 만한 월급봉투였지만 아버지는 큰 희망과 포부를 가집니다 .
왜냐하면 그 당시로써는 일인 사장으로부터 갖은 수모와 멸시 천대를 받아 가면서 혹사를 당하지만 최첨단 상점경영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철저하게 일인상인 밑에게 경영수업을 혹독하게 받게 됩니다
또한 미소년이었던 아버님께서는 언젠가 종자돈을 모아 상점을 차려 몰락하기만 했던 우리 집안을 다시 부흥시켜 일으키겠다는 힘찬 포부를 점원 생활을 하면서 가지게 됩니다
사업 밑천을 모아 상점을 차리고 사업도 크게 일으켜 집안도 세우고 소위 요즈음 말하는 젊은 벤처 CEO로 거듭나리라고 당찬 결의를 합니다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서러운 가난의 사슬을 끊고 얽힌 질곡의 사슬들을 끊어 버리며 훨훨 풍요의 세상 속으로 날개를  활짝 피며 비상하리라 다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린 청년에게는 녹녹하지 않아 우리가 쓰는  말대로 ‘쉽지 않은 전투’이었습니다 .
우리 집안에 회자(膾炙)되는  재미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어쩌면 재미 있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슬픔의 떼가 묻어 있는 애환의 이야기이겠지요
일인 상점 주인은  항상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라고 이야기 하곤 했답니다.
그리고 장사꾼은 아싸라해야 한다
일본 문화적 표현이지요.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섬에 갇혀 살다 보면 서로 부대끼는 일들이 많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를 항상 조심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국까지 흘러 들어 왔나 봅니다.
아버지는 항상 이 말들을 교훈 삼아  마음속에 담아 두나 보니 저 사람은 보증 수표라는 별명을 듣고 싶어했고 남들에게 신용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세월이었다고 술회하고  했습니다.

아마 그때가 다시 표현하면 1930년부터 19511.4후퇴 때 미군 군용 트럭을 타고 홀로 도망하듯이 내려온 시기까지 즉 평양에서 산  약 20년간의 평양생활이 일생 중 할머님을 모시고 효자로써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후 6.25 동란 후로부터는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물거품이 되어 버리지만,,,
그렇지만 여기에서 아버지는 상인으로 거듭나면서 우리 집안에 그 동안에는 없었던 새로운 피가 수혈되기 시작합니다.
즉 우리 집안의 귀중한 상인 정신이 발아하기 시작합니다.
가끔씩 하늘엄마 몸 속에는 우리의 유전인자 DNA
선비정신과 상인정신이 느껴 질 때가 많습니다.
선비라는 토대 위에 상인이라는 가지를 접목 시키어
그 후 평생토록 상인으로써 유감 없는 삶을 사셨던 것도 소학교 졸업 후 배운 상점 교육 덕택이라고 생각 됩니다.
물론 아버지는 선천적으로 선비정신이라는 뛰어난 능력을 배경지식으로 갖고 태어난 것도 큰 행운이라 하겠지만...
넓게 보면 이 모든 것이 것이 우리 조상들의 음덕이라 생각 됩니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이렇게 편안하고 즐겁게 부유하게 유년시절을 보내고 대학 교육까지 받게 되고 평탄하게 사는 것도 아마 우리 부모님들의 끈질긴 상인정신과 선비정신의 또 다른 발현이라 여겨집니다
이때 만약 그대로 아버지께서 평양으로 와서 취직하지 않고 평남 성천에 계셨다면 하늘 엄마는 아마 평범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북한에서 살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처럼 전략적인 아버지 머리와 판단은 계속해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럼 아버지의 결혼이야기를 사랑이야기를 해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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