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5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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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 장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뒤로 물리고 제 7장 하늘 엄마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보겠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렸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우주
2.    지구
3.    생명
4.    인류
5.    세계사
6.    한국사
7.    하늘엄마
8.    세계정부
맺는 말

그런데  1장 우주는 천문학적 지식이 상당히  필요하고
2장은 지질학 지식을  필요로 하고
3장은 생물학적이 지식이 필요하기에
우선은 쉬운 제 주변 사물부터 이야기를 하면서 추후에 1장과 23장을 완성시켜 보겠습니다.
6장 한국사는 지금 계속 한국 문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역사 이야기를  문화와 함께 병행해서 서술하여 보겠습니다.
이것으로 6장은 대체가 될 것 같습니다.

5장 세계사 이야기는 한국문화사를 이야기를 마친 후에 천천히 할 예정이며 그와 함께 4장 인류에 발자취 이야기도 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사 이야기는 제가 학창시절 국어시간과 함께 가장 즐거웠던  이야기 시간이었으며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과거를 조망하며 음미 할 줄 알아야 현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하며 창조 할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항목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8장 세계정부 이야기는 저의 오래 된 아이디어로 앞으로 우리의 세계정치 경제를 조망해 보면서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처럼 저 역시 현대판 메시아를 세계정부 수립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현대판 춘추 전국 시대 같은  세계 정치 경제 상황에서는 많은 혼란과 전쟁 테러 기근 환경 오염 및 심각한 빈부 격차로 인한 갈등 유발 등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판 칭기스칸이나 진시황이 등장해서 천하를 통일해야 문제가 좀더 해결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미륵사상이고 샤머니즘 식으로 표현하면 정감록에 나오는 정도령 사상입니다,
그래서 세계정부 수립을 기대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부정적인 측면에서 돈키호테 식 사고 일수도 있다고 봅니다
추후에 제 생각과 사상들을 정리하여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7   하늘엄마
우선은  제 이름인 하늘엄마를 통하여 바라본 세상에 대한  시각을 하나 둘씩 풀어 보겠습니다.
지난 유월 달  夏至(하지) 동반한 여름이 어김없이 우리 곁으로 찾아 왔네요
60번째 생일도 함께 덩달아 따라 왔습니다.
환갑(環甲)을 맞이하는 나의 마음은 그지없이 참담하기도 하며 찬란한 무지개 빛이 영롱하게 빛나기도 합니다.
回顧(회고) 보면
돌이켜 보면
좌절과 갈등 고통 번민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세월이 아니었나 자문해 봅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쓸쓸하고 황량한 平靜(평정) 뿐인데...
그렇게도 지긋지긋 했던 입시 트라우마도
애틋했던 첫사랑의 상처도
뜨거웠던 雲雨(운우) ()
어릴 동네에서 차임 벨이 울리면 놀던 뿌리치고 교회로 뛰어갔던 동심 어린 신앙도
무지개를 좇기 위해 애쓰던 稚氣(치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직
삭막한 벌판 위에서 울부짖는 늙고 초라한 늑대의 울부짖음만 투영 되는데...
이제야
.어처구니없게도...
사물의 의미를 년이 지나서야 알고 인생의 의미를 60甲子(갑자) 흘러가 버린 다음에야 듯도 합니다.
허허로운 苦笑(고소) 나옵니다.
다시 한번 인생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안녕 있었니 ?
이름은 하늘 엄마.
너의 이름은 인생.
너는 누구니  그리고 어디서 왔니?”
인생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나야 !.
나는 너와 함께 같이 가는 친구야.
네가 힘들고 외로울 너를 위로하고 너를 보호하며 너를 감싸는 동반자야
나의 의미는  ‘하늘은 푸르고 땅은 누렇고 세끼의 밥을  먹는 것으로 족하다이지
그래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젊은 시절부터 하곤 했지. 너를 만나면 물어 보고 싶었어 무던히도
그래 이제야 너와 만나 마주 대하니 속이 후련하다!
과연 너의 의미가 무엇인지 ?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방황하며 좌절해야만 했는지 묻고 싶었어 너에게..”
했어 어린 이이들은 싸우면서 크듯이
인간은 나에게 물으면서 성장하는 거야.
호기심이야말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고 나를 만나는 통로요 지름길이기도 하지.”
그래  너야말로  수수께끼이고 신기루며 무지개구나.
이제야 일장춘몽(一場春夢) 곁으로 다가와 미소 짓고 있구나.
너는 할말 없니
나도 말이 많지 .
흔히들 나를 원망하지만 그것은 잘못이 아니야
 원래 구조가 그래서 그런 것이야.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도 표현하고 능력이라고도 표현하지.
네가 나를 기대했던 것처럼 나도  너를 기대하고 있어
네가 나를 기대하고 기대하고 있다고?
정말이야. 역시 너의 성취와 분발을 응원하고 있지
정말 그렇니?
천지가 요동 코페르니쿠스 전환이구나
그래  나는 결코 너의 나쁜 친구가 아니야.
단지 네가 나를 나쁜 친구로 만들고 있을 뿐이지
내면적인 만족을 모르고 외부에서 무지개를 찾아 헤매기만 해서 그렇지
그래 좋아 내가 너를 통해서 겪어야만 했던  시간들을 너에게 이야기 주지 너도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달라질 있을 …”
그래 한번 들어 보자!”
7-1 : 하늘 엄마의 집안 이야기.
7-1 : 하늘 엄마의 집안 이야기
인생 친구를 만나 동안의  체험했던 이야기를 뒤풀이 삼아 하나씩 둘씩 회포를 풀어 봅니다.
우리 집은 평양이야 모란봉과 밀대가 있는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동네이지.
흔히들 우리 나라 속담에 자기가 싫은 평양감사도 한다 말이 생겨 정도로 누구나 가보고 싶은 색향이기도 .
그러나 반골의 땅이기도 하지.
역사적으로는 고조선이 있던 땅이고  후에 고구려의 수도이기도 하고 고려 때나 조선 시절에는 2 수도이기도 정도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지.
그리고 중국을 향해  저항하는 반골의 정신이 충만한 곳이기도 하지.
지금은  방향이 미국으로 향해서 문제가 되긴 하지만
좌우간 역사적으로 한한 땅이야.
유명한 () 많은 대동강이 흐르고 있는 땅이기도 하지

모란봉  전차역 번째 집이며 곳이 사거리로 100평정도 된다 작고하신 아버님께서 말씀 하시곤 하셨지.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평양 우리 집을 방문해 보라고 유언을 남기고 가셨어.
역시 살아 생전에 한번 가보고 싶은데 세월이 워낙 하수상하니 어떨지 모르지.
내가 가면 우리 외동딸에게 가보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기고 있어.
 물론 조카에게도 계속 간혹 이야기를 주입시키고 있어.
나의  집안 역사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자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나의 사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책무 일수도 있다고 생각해.
  논리적인 비약이겠지만 유태인들처럼 조상들의 고통과 좌절을 알아야 또다시 그런 수모를 겪지 않을 있다고 수도 있지.
장황해 졌구나.
그래 좋아 재미있겠는걸 .
한번 집안의  뿌리부터  내력부터 천천히 재미있게 이야기를 전개 해봐.
서둘지 말고 편안하고 자유스럽게 쉽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교훈을 동반해 가면서
하늘 엄마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인생 내가 너를 기대하고 있어
그냥 말을 해봐.
자연스럽게
 “우리집안은 큰아버지와 아버지에서 1950 6 25 북한 인민군이 탱크를 몰고 남침한   6.25 한국 전쟁 동란 중에 평양에서 구사일생으로 피난을 내려 왔어
이야기부터 시작 할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집안의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부터 해야 순서겠지…… 들어봐 이야기는 어머니로부터 어깨 너머로 들어 것들이라  조각 정보들을 모자이크 식으로 짜깁기 해서 만들어 이야기야.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아서 종합적으로 상상력을 조금 보태서 이야기를 풀어 볼게.
 왜냐하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분다 평양에서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평생 본적이 없어 .
단지 아버지와 큰아버지 할머니 초상화가 안방에 있었거든 그래서  상상의 날개를 펴고 할머니를 만나러 가곤 했을 뿐이지..
우리 할아버지는 전설 속의 인물이라 우리 아버지도  얼굴을  모르고 자라나셨어.
아버지도 () 많은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셨지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질곡의 삶을 겪어야만 했겠지만
원래 우리 본향은 평양이 아니고 평양에서 동북방향으로 위치에 있는 성천군이야
우리 집안의 할아버지께서는 순사(순경)였다는 말도 있고 식당에 식품재료들을 납품하는 도매상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누구 이야기가 맞는지는 모르고 있어 아니면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우리 할아버지께서 무서운 순사(지금의 순경)였다는 이야기는 친일파였다고 몰릴 있는 집안의 치욕스러운 이야기 일수도 있어. 그러나 집안의 내력을 미화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가감 없이 전달하고 기술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고 인간 본연의 정신 일수도 있다고 .”
그래 요즈음 자서전들이나 회고록들은 친일파들도 독립군으로 둔갑시키거나 애국자로 미화시켜 회고록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지.
 이미지  메이킹을 화장시켜 다른 인물로 미화시키는 짓을 먹듯이 하고 거짓말로 윤색해 무슨 위인이나 되는 것처럼 신화적 인물로 만드는 세태니까…”
내가 자라면서 들은 이야기 하나는 우리 할머니가 무척이나 여장부이었고   괄괄하셨다고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어.
 또한 샤머니즘을 좋아해서 집안에 신상들을 간직하며 아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옛날에는 누구나 잡귀를 내쫓고 부귀 영화를 원했기 때문에 그랬을지 모르지 .
지금도 현대인들의 황금만능주의와 일맥상통하겠지만
인간들은   마찬가지겠지만
또한 은밀한 사실중의 하나는 우리 할아버지에게 할머니를 후처 자리로 들어 앉혔다고 들었어.
할머니께서는   자식을 5명이나 남편으로부터 낳았다는데 어떻게 후처로 다시 재가했는지도 의문이야.
그런데 5명이나 애를 낳고도 어찌해서 후처로 재가를 하셨는지는 미스터리야
  당시 풍습과 정서로는 일반적인 상식 수준이었는지도 모르지.
좌우간 어떻게 처와 자식들이 있는  할아버지와 자식이 5명이나 있는 할머니가  다시 결혼하시겠는지도 궁금해..
평양에서 피난 내려 오신 큰형의 말로는 도매상으로 식당에 식품을 납품하다가 눈이 맞아 결혼하셨다고 그랬어.
그런데 옛날에도 자유스럽게 결혼을 했을까?
당시에는 누구나 자녀를 10명정도는 기본으로  낳았으니까..
물론 중에서도 많은 애기들이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또한 피임도 없고 자연 순산을 일반적으로 생각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지
지금처럼 하나 낳아 기르기도 벅찬 세대와는 하늘과 차이겠지만…”
그래 지금과 너의 할머니가 사셨던 19세기와는 격세지감(隔世之感)으로 사뭇 모든 정서와 환경이 판이하게 다르겠지.”
만물은 변하는 거야 .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것이 인생이야.
흐르는 속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고 핵심인 같아.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 할머니의 아버지가 고관 대작 부잣집이었다는 전설이 있어 .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가 부잣집 딸이었다는 이야기지.
왜 부잣집 딸이 후처로 들어 갔는지도 미스터리이고 할아버지가 없이 과부의 집안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도 역시 우리 집안에서 회자 되고 있어. 그러니까 할머니 큰아버지 아버지 세 식구가 힘들게 평양에서 사셨다는 거야.
옛날에는 그 당시 누구나 후처나 첩을 들이는 것이 상례화 되어 있었던 것이지.
그래 그래 첩을 들이는 것이 관행이었나 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할머니의 아버님께서 우리 할아버지를 건달로 취급하며 안 종아 했다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어
왜 안 좋아 했는데?
이유가 가난해서인지 순사여서인지 혹은 건달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장인(우리 할머님의 아버지)께서 고관 대작이어서 그런지 전혀 추측되는 바가 없어. 단지  정서적인 느낌으로는 남의 귀한 딸을 후처나 첩으로 데려 간다는 사실에 기분이 몹시 상하거나 자기의 체면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했겠지..
혹은 당시 시대 정서가 후처로 자기 딸을 시집 보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좌우간 사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고관 대작의 딸이 후처로 순사한테 시집갔는지도 이해가 되지만
그러나 할머님께서는 큰아버님과 아버님을 끔찍이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평양에서 돌아가시기 까지 아들들을 의지하며 사셨다고 들었어.”
너는  할머니를 전혀 적이 없니?”
나는 전혀 할머니를 본적도 없고 단지  안방 문갑 위에 오롯이 식구가 그려진  초상화롤  통해서만 있었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척들을 모르고 자랐으니까 친척 개념이 희박했겠네?”
그래 친척의 족보도 모르고 자랐고   조금 가족간의 정이 옅다는 것을 결혼을 하고  후에야   알았어.
. 어릴 적에는 당연히 일상적인 일이라 모르고 지내 왔지.
특히 큰아버님께서는 평양에서 초등학교를 나오셨는데 학교 다닐 항상 성적이 우등을 하셔서 상과 함께 많은 칭찬과 애정을 할머님으로부터 독차지 했다는 이야기를 어머님으로부터 듣고 자랐어.
그러나 우리 아버님께서는 안타깝게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셨던 같아.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워낙 가난하셔서 둘째 아들은 학교에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하셨지.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엄청난 사건이지만 당시 풍습으로는 다반사였어.
오히려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만 해도 사치였고  감지덕지로 생각해야 하는  시절이었지.
 1920년대의 당시의  눈물겨운 시대상이었지
사족이지만 사촌 형이 공부를 것은 아버님을 닮아서 그런 것이라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곤 했어
혹시 평양에서 있었던 비사(秘事) 많이 있을 텐데 …”
차차 그런 우리 집안의 비사(秘史)이야기도 할께
마음이 급해지고 웬지 부끄러워지는구나.
과연 우리 집안 이야기를 세상에 공표해야 하나 하고
왠지 쑥스럽고 부끄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그냥 우리끼리 얘기를 해봤지 인생 너에게까지 이렇게 야기하리라고 생각을 유보해 두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겠지.
언젠가는 나에게도 나의 인생 여정을 이야기 하고 싶었거든 .
그래서 세상 밖으로 튀어 나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좌절과 고통으로 가득 우리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자기 스스로 만든 창의적인 길을 찾았으면 좋을 같다는 상념에서 이야기를 너에게 하는 거야..”
고마워 나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 줘서..
누구나 저마다의 짐을 지고 인생길을 걸어 갈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겠지..
좀더 지혜롭고 스마트한 삶이 되기를 바랄 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어릴 적부터  많이 놀아보고  많이 책을 읽어 보고 많이 주위 사물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이 서술해보는 것이 좋아.”
그래 인생 너는 지혜자이며 종결 자이구나.
많이 나에게도 알려줘 너의 지혜와 지식과 삶의 의미를…”
우리 집안의 역사를 이야기 있다니
아무도 관심이 없는 이야기들이라 또한 자랑스럽지 못한 집안 내력이라서 그런지 다들 덮어 두려고만 하는데...
그냥 마음속 깊이 심연 속으로만 전수하려고 했는데
물론 누구도 관심을 보이는 않을 수도 잇겠지만
뜻밖에 네가 관심이 보이다니 단기(單騎) 싸우다가
백만 원군(百萬援軍) 만나는 같아 흐뭇하기만 .
아마 10 이나 20 되었겠나 우리 집안의 역사가 궁금하여 종로에 있는  동대문 시장에서 복덕방 하시는 이복 형님에게 우리 집안 내력에 궁금하여 여쭤 적이 있는데 무척 당혹해 하셨으며 사건이 아버님 귀에도 들어가 자식이 아버지 뒷조사나 하고 다닌다고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새로워 .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인데 지금도 나의 뇌리에 각인이 되어 있다니
슬픈 자화상이야..
물론 아버님과 아버님은 후처의 자식이고 이복 형님은 본처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지.
커서야 족보 관계도 알게 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조선은 양반제도로 인한 신분제도가 엄연히 존재했고 서자들을 차별하였기에 조선의 정서가 그대로 답습되어 큰아버님이나 아버님이나 이복 형님께서 함구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어릴 적부터 느껴온 아픔이나 고통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으려는 보호 본능이 있는 법이지요.
할머니 모습이 자못 궁금해 한번 뵙고 싶은데
어떤 분이셨는지
손자라 무척 귀여워 주셨을 텐데
그렇게도 큰아들만 애중중지 키우셨고 작은 아들에게는 냉대를 하셨는지…”
정도로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습을  대강이나마 스케치해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 아버지와 큰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평양 결혼생활 이야기를 소묘해  보겠습니다..

덧붙임:
혹시 중고생들을 위하여 사전을 찾아 단어의 뜻을 올립니다.
요즈음은 한자를 배우지 않아 생소한 단어인 것  같아서 이렇게 단어풀이를 해 봅니다.
참고하시기를

색향색향 [色鄕]

  • 색향: 미인이 많이 태어나거나 기생이 많은 고을

  • 반골 1.권력이나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기개
  • 2.쉽게 다른 사람을 따르거나 복종하지 않는 기질

  • 구사일생 주로 ‘구사일생으로’의 꼴로 쓰여, 아홉 번 죽을 뻔하다 한 번 살아난다는 뜻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고 겨우 살아남을 이르는 말
황금만능주의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나 태도
  • 비사 밖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내지 말아야 할 일 또는 사건

다반사 차 마시는 일이나 밥 먹는 일과 같이, 일상에서 늘 일어나 대수롭지 않은 일

  • 감지덕지 1.과분한 듯하여 아주 고맙게 여김
  • 2.과분한 듯하여 아주 고맙게 여기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 백만 원군: 백만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전투에서, 자기편의 싸움을 지원한다는 뜻입니다
 
단기 : 홀로 말 한 필로 싸움을 한다는 뜻입니다.
  • 애지중지 매우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 냉대: 정이 없이 차갑게 대함

7 2절 평양시대
지난 번 7-1에서는 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잠깐 다루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저의 부모님들의 평양 시절의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평양시대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그전에 우리는 평양 땅이 어떤 땅인가를 개괄적으로 조망한 후에 우리 집안의 평양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역사적 순리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 평양 땅에 대한 제 역사 지식을 나열하겠습니다.

지도 책에서 평양을 들여다 보면 평양 땅은 한 가운대로 대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서울이 한 복판으로 한강이 흐르고 있듯이...
중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최초의 우리 민족이 B.C 2333년에 세운 나라인 세운 고조선을 이야기 하면서 그 당시 민중들에게서 구전으로만 전래되어 내려오는 단군왕검 신화를 이야기 합니다
즉 어느 날 환인이 자기 아들 환웅에게 지상으로 내려가 새로운 신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명합니다

그래서 신하 3000명을 이끌고 태백 神市(신시)로 내려와 고조선을 건국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태백 신시가 압록강 근처 도시라는 사람도 있고 평양이라는 사람도 있고 만주의 어느 강가근처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처럼 평양은 유구한 역사와 동북아시아문명의 중심지요 젖줄입니다

인류최초로 4대 문명이 큰 강가에서 일어났듯이 동북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로 대동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 후 BC 2333년에  새워졌던 고조선은 BC108년 중국 한나라에게 멸망 당하는 비운을 맞이합니다 그 다음에 BC1세기 경 고구려 궐 백제 신라 등 많은 동북 아시아 나라들이 세워집니다 처음에는 고구려가 만주 압록강 근처에 있던 졸본 성과 압록강 근처 집안의 국내성에서 수도가 생기지만 광개토 대제 이후 주위 만주 땅을 다 평정시킨 이후에는 장수 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대동강은 상무정신을 충만한 반골의 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결코 명멸하는 중원의 중국 나라들에게 굴복 하지 않고 동북아 패자로써 자기 년호(年號)를 쓰며 천하의 중심처럼 무인정신을 온 천하에 떨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과 마찰 할 수 밖에 없고 중국의 수 나라와 싸워 멸망 시켜 버리고 다음 번에 중국 당나라와 여러 번 싸워 승리하기도 하고 끝내는 멸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발해와 고려와 후 금과 청을 세워 중국과 겨루며 중국을 다시 굴복시켜 청나라를 건설 하기도 합니다

그 중심에 평양의 대동강이 있다고 생각 됩니다. 조금은 역사적 비약이겠지만...

만주로 가기 위해서는 분명히 대동강을 건너야 하고 평양을 지나가야 하기에 숱한 전란의 화마에 휩싸이기도 하고 조선시대에는 유배지의 땅으로 반역의 땅으로 천덕꾸러기의 경계의 땅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좌우간 고려 시대에는 묘청의 난으로 조선조에서는 홍경래 난으로 항상 혁명의 땅으로 인식 되게 됩니다.

지금도 대동강 물은 마시는 평양사람들은 미국의 가시로 여겨지게 되고 중국인들에게는 골치 덩어리로 여겨지는 것과 일맥 상통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랑스런 尙武(상무)反骨(반골)氣槪(기개)의 땅이네요
역사 속에서 선 과 악은 없고
문명 속에서 우열이 없듯이
서로 다름과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럼 우리 가족이야기로 돌아와서
저의 아버지께서는 소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즉 1930년경 신 문물로 근대화의 여명이 밝았던 평양 땅을 밟게 됩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일인들이 많은 상점을 소유했고 우리 나라 정치경제를 쥐락펴락 했겠지요

지금 시각으로 봐서는 그 일본인 밑으로 들어가서 점원 생활을 한다는 것은 치욕적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그 당시 시각으로 봐서는 그렇게 찬밥 더운 밥을 가릴 게재가 못 되었을 것으로 가난의 절박함이 묻어 있는 고난의  일제 강점기였습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삼성이나 현대 사원으로 들어간 것으로 치환해서 생각한다면 무난하리라 사료됩니다.
아마도 평양시내는 그 당시 할머님과 아버지 등 시골 사람에게서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휘황찬란한 전기 빛이 들어 오는  평양의 밤거리는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인맥을 통해서 근처 일인 상점에 취직되어 할머님을 모시고 평양 어느 변두리 구석 단칸방을 구하고 평양 생활을 시작 했습니다.
평안 남도 성천군에서 자란 아버지는 시골과 대도시 평양은 하늘과 땅 차이 만큼 신천지였고 청운의 꿈을 키우기에는 벅차고 안성맞춤의 도시였으며 피 끓는 청춘에게는 청년 드림의 땅이었지요.
월급은 일인 상점 주인들에게 받은 쥐꼬리 만한 월급봉투였지만 아버지는 큰 희망과 포부를 가집니다 .
왜냐하면 그 당시로써는 일인 사장으로부터 갖은 수모와 멸시 천대를 받아 가면서 혹사를 당하지만 최첨단 상점경영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철저하게 일인상인 밑에게 경영수업을 혹독하게 받게 됩니다
또한 미소년이었던 아버님께서는 언젠가 종자돈을 모아 상점을 차려 몰락하기만 했던 우리 집안을 다시 부흥시켜 일으키겠다는 힘찬 포부를 점원 생활을 하면서 가지게 됩니다
사업 밑천을 모아 상점을 차리고 사업도 크게 일으켜 집안도 세우고 소위 요즈음 말하는 젊은 벤처 CEO로 거듭나리라고 당찬 결의를 합니다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서러운 가난의 사슬을 끊고 얽힌 질곡의 사슬들을 끊어 버리며 훨훨 풍요의 세상 속으로 날개를  활짝 피며 비상하리라 다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린 청년에게는 녹녹하지 않아 우리가 쓰는  말대로 ‘쉽지 않은 전투’이었습니다 .
우리 집안에 회자(膾炙)되는  재미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어쩌면 재미 있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슬픔의 떼가 묻어 있는 애환의 이야기이겠지요
일인 상점 주인은  항상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라고 이야기 하곤 했답니다.
그리고 장사꾼은 아싸라해야 한다
일본 문화적 표현이지요.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섬에 갇혀 살다 보면 서로 부대끼는 일들이 많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를 항상 조심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국까지 흘러 들어 왔나 봅니다.
아버지는 항상 이 말들을 교훈 삼아  마음속에 담아 두나 보니 저 사람은 보증 수표라는 별명을 듣고 싶어했고 남들에게 신용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세월이었다고 술회하고  했습니다.

아마 그때가 다시 표현하면 1930년부터 19511.4후퇴 때 미군 군용 트럭을 타고 홀로 도망하듯이 내려온 시기까지 즉 평양에서 산  약 20년간의 평양생활이 일생 중 할머님을 모시고 효자로써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후 6.25 동란 후로부터는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물거품이 되어 버리지만,,,
그렇지만 여기에서 아버지는 상인으로 거듭나면서 우리 집안에 그 동안에는 없었던 새로운 피가 수혈되기 시작합니다.
즉 우리 집안의 귀중한 상인 정신이 발아하기 시작합니다.
가끔씩 하늘엄마 몸 속에는 우리의 유전인자 DNA
선비정신과 상인정신이 느껴 질 때가 많습니다.
선비라는 토대 위에 상인이라는 가지를 접목 시키어
그 후 평생토록 상인으로써 유감 없는 삶을 사셨던 것도 소학교 졸업 후 배운 상점 교육 덕택이라고 생각 됩니다.
물론 아버지는 선천적으로 선비정신이라는 뛰어난 능력을 배경지식으로 갖고 태어난 것도 큰 행운이라 하겠지만...
넓게 보면 이 모든 것이 것이 우리 조상들의 음덕이라 생각 됩니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이렇게 편안하고 즐겁게 부유하게 유년시절을 보내고 대학 교육까지 받게 되고 평탄하게 사는 것도 아마 우리 부모님들의 끈질긴 상인정신과 선비정신의 또 다른 발현이라 여겨집니다
이때 만약 그대로 아버지께서 평양으로 와서 취직하지 않고 평남 성천에 계셨다면 하늘 엄마는 아마 평범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북한에서 살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처럼 전략적인 아버지 머리와 판단은 계속해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럼 아버지의 결혼이야기를 사랑이야기를 해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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