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엄마 소설
목차
들어가는 말
1. 우주
2. 지구
3. 생명
4. 인류
5. 세계사
6. 한국사
7. 하늘엄마
8. 세계정부
맺는 말
들어가는 말 (프롤로그)
나의 이름은 하늘엄마입니다.
이제 60년 넘게 한반도 땅 위에서 실아 오면서 보고 느낀 이야기를 소설 형식을 빌려서 대장정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우리 함께 오솔길을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 하듯 나의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어요
자 그럼 슬슬 시작을 합니다.
이야기란 원래 재미 있으니까
이야기란 워낙 쉬우니까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역사적 교훈과 삶의 의미를 전달한다고
봅니다..
이 소설을 쓰게 된 기본적인 동기는 1976년 재수 시절에서 시작 됩니다.
그 시절로 돌아가 그 당시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전개해야겠습니다.
그 당시 분위기를 우선 전달해야겠군요.
하늘 엄마는 그 당시 대학입시에 낙방하여 자연히 광화문에 있는 재수학원에 등록하여 일년간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복습하며 대학입시를 반복해서 준비해야 하는 곤혹스럽고 좌절로 점철된 시간들을 만나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일반적인 재수생들의 대체적인 시각은 오로지 명문대에 합격하여 부모님께 효도하고 입신양명하는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인식되었고 그 외 다른 길을 쳐다보는 것은 외도로 여겨지는 일탈로 간주된 시기였습니다..
평생을 입시지옥에 살다 보니 누구나 자연스럽게 형성된 획일적이고
정형화 된 모델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은 당연한 시대 상황이었지요
즉 사지 선다형의 정답 형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나도 모르게……
시대가 우리를 로봇으로 세뇌화의 박제로 완제품을 만들어 놓아버렸답니다. .
그런데 하늘엄마는 그런 시각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별로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는 동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 하늘엄마는 관심과 흥미를 못 느꼈을까?
첫째는 지나친 입시위주의 암기교육에 지쳐 탈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시험제조기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기에는 물리적으로
방전이 다 된 상태로 더 이상 입시를 향한 목표 지점에 골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둘째는 좋은 명문 대학에 합격한 후에 좋은 성적을 받아서 재벌 회사에 취직해서 과장 부장 이사 사장으로 승진하는 정규적인 코스에 대해 추호의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또 마지막으로는 본질적으로 ‘인생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골똘히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입시에 대해 곤두선 신경이 반감이 되었고
오히려 그 질문을 매개로 하여 감옥 입시를 탈출한 은신처로 여기며 그 질문을 핑계 삼아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하늘 엄마의 여정이 시작되기 시작 합니다.
어쩌면 어릴 적부터 위인전과 동화와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당연한 운명의 만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남들이 다 입시에 올 인하고 목을 매달 때 하늘 엄마는 그 궤도에서 일탈되어 인생에 대해 탐구하는 어처구니 없는 그리고 무모한 방황으로 가득 찬 자기 유배의 길을 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도정에서 만난 친구들 중 하나가 소설이기에
그를 통하여 하늘엄마가 살며 느낀 고통과 좌절들을 글로 표현하여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기분으로 삶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자 그럼 함께 우리 하늘엄마가 걸어가야만 했던 그 귀양의 길들을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하며 슬슬 떠나 볼까요?
그 길이 가시밭이 되었는지 천국으로 향하는 꽃 길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북망산 갈 때쯤이나 판가름 나겠지만 ……
판명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지극히
주관적이고 모순적이며 일회적인 판결에 불과하겠지만……
좌우간 대장정을 길을 유리해야만 했던 젊은 날들을 회고하며
길을 따라가 봅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절로 시귀가
따 옵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축복 있으라!
영광 있으라!
1. 우주
하늘엄마는 고2때 친구들과 함께 충청도 공주로 캠핑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은 삼국 시대 때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으로 인해 서울에
있는 위례성을 버리고 충청도로 쫓겨 가서 세운 2번 째 도성으로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고장이기도
합니다.
1970년대 한국의 실정은 경제 도약 기였으며 어느 가정이나 가난하고 물자가 부족한 시절이라 2-3인용 A형 텐트 하나로 7-8명의 고등학생들이 야영을 하며 지내야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2개조로 나누어서 밤잠을 자야 하는 자연스러운 계획이 저절로 생겨 나게 되었습니다.
원래 하늘엄마는 잠에 관한 한 잠을 잘 청하는 잠의 신(神)이었기에 먼저 텐트에 들어가서 신나게 잠을 자고 있는데 새벽1-2시쯤 누가 몸을 발로 차는 느낌을 느꼈다
“누구니? 왜?”
“응. 야 일어나 나도 텐트 속에서 잠을 자보자”
그 친구는 그 동안 그냥 풀 위에서 누워 있다가 몸의 한기를 느껴 하늘엄마를 깨운 모양입니다.
하늘엄마는 비몽사몽간에 깨어 몸을 일으켜 텐트 밖으로 나와서 쭈그리고 앉아 게슴츠레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때 하늘을 나에게 반가워 손짓리라도 하듯이 굉장한 우주 쇼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엄마가 평생 살아 왔던 서울 같은 도심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습니다.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수 만개의 별들의 총화는 그야말로 압권이요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어찌 저렇게 광대하고 무변하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우주는 아름다움과 회심을 시작하는 사람이며 종결 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두려움과 징그러움으로 변질 되어 벌일 수ᅟᅵᆯ 수도 있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곧 과정 상의 극치일수도 있었습니다.
그럼 왜 첫 서두를 우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 할 수 밖에 없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우리 삶의 시작은 우주에서 왔고 우리 생의 끝은 우주로 다시 환원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시작이고 끝이기에……
우리는 우주에서 왔고 이 지구에서 아직은 살 수 밖에 없는ᅟᅳᆫ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류는 지구의 자식이며
그것처럼 지구는 우주의 산물이기에……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태초의 우주에서 시작하여 과거를 거쳐 오늘을 통과한 후에는 미래를 조명 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사료합니다..
또한 인간은 이 지구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지구 한 모퉁이에 기생하는 박테리아 세균에 불과 할 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의 원향인 우주를 항상 생각하고 배워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줄도 모롭니다.
우주에는 1000억개 쯤 되는 은하가 있고
그 은하들 안에는 1000억개쯤 되는 행성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통계적인 접근에 불과하다고 천문학을 전공한 후배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기억납니다.
어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 많은 은하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무량대수를 능가하는 천문학적 숫자의 존재가 가능할까?
하늘엄마는 천문학 책들을 보며 그냥 멍청해지고 경이로워질 뿐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늘엄마는 하다 못해 아주 천천히 우주를 생각하며 매일 펼쳐지는 구름과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와 대화를 하기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비록 소리 없는 메아리로 들려 오겠지만
가장 의미 있고 가장 친하고 다정한 벗과의 대화이기에 자연스런 일과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늘엄마는 우주와 인사부터 하기 시작 해야겠지요.
“우주야 안녕! 그 동안 잘 지냈니?”
우주도 아주 반가워하며 응답을 보냈습니다.
“안녕 하늘엄마 !
그 동안 잘 지냈어?
아픈 데는 없고 왜 인제야 놀러 왔니?
더 일찍 나를 찾아 왔으면 네 인식의 지평이 넓혀지고 식견이 툭 터졌을 텐데!”
우주는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교차되는 미소를 하늘엄마에게 보냅니다.
“응 미안해 우주야 .
그래도 이제나마 늦게라도 너를 찾아 왔으니 다행이지.
너를 못 찾고 그냥 쓸쓸히 그리고 무심히 지나쳐 버리는 그 숱한 사람들보다 이렇게 일찍 왔으니 다행이고 반갑구나 우주야...”
“잘 왔어 어서 안으로 들어와 나랑 신나게 놀자.
내가 너에게 보여 줄 것이 많구나.
선물도 많이 준비돼 있어.
이 10의 22승 되는 보석들이 너를 위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구나.
네가 다 가져 가.“
“ 정말 . 하야 고마워 신난다.”
하늘엄마는 그의 집에 대해 외경과 두려움과 질투의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흘러 넘쳤습니다.
하늘엄마 자신이 그의 집에서부터 왔고 그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기뻤고 허전하기 까지 했습니다.
하늘엄마 자신도 우주의 자식이기에...
“우주야 너는 나이가 몇 살이니?”
“내 나이는 140억 살 정도야
지금부터 140억년 쯤 빅뱅이론처럼 태어났지.
다시 말해 말씀으로 태초가 열린 로고스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뭐라고? 네 나이가 140억이라고...”
하늘엄마는 아연질색 이라고 말해야만 했다.
그의 나이가 140억살 정도 된다니...
고작 하늘엄마의 나이는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불과한데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어린아이의 어린아이도 못 되는 그런 정도 이니까.
어찌 우주의 나이를 엄두를 낼까?
“우주야 그 동안 너는 무엇을 하면서 지냈니?”
“응 나야 장난하면서 공기 돌들과 장난 치면서 공기 돌들을 이 우주 공간에 뿌려 보며 놀았지”
절로 하늘엄마는 神(신)의 개념이 떠오르며 천문학에 대한 책들이 연상되기 시작 되었습니다.
그들과 벗하게 되니 기분이 한결 상쾌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하늘로 상승하는 멋진 고독의 시간이 되어서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그래 기뿔 때나 슬플 때나 힘이 들 때나 힘이 넘칠 때나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그를 쳐다 보며 그와 대화를 나눠 보자.
그를 친구 삼을 때에 세상사 다 진주처럼 빛날 것이고 세상 고통이 벌레처럼 보이리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주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늘을 쳐다 보고 틈틈이 도서관에 가서 우주에 관한 책들을 빌려 와서 읽어 보지만 그는 그리 녹녹한 상대가 아니었다.
쉽게 그의 본 모습을 알기가 어려웠고 그를 통해 더 많은 지식들을 접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기나긴 가시 밭 길 같았다.
일반인들을 위하여 쓴 책들도 대체적으로 천문학자들이 쓴 것들이라 자기 수준에 맞게 써서 그런지 도통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늘엄마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
즉 물리에 대한 배경지식이 그리 충족되지 않아 보니 아니면
태생적으로 물리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물리를 통해서 천체 지식으로 나아가야 하는 요즈음 실태에서는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하늘엄마 역시도 한국전쟁이 반발 이후 태어난 베이비 부머 세대 사람이라 정규교육을 받아 학교 다닐 때 물리와 화학 생물 등을 배웠지만 제일 관심이 없고 이해하지 못했던 과목이 물리였다.
고등학교 시절 일주일에 딱 한번 물리 선생님께서 들어와서 떠들다 나가는 물리 강의는 멀리서 들려오는 우주 소리와 같았고 가느다랗고 아련한 아지랑이처럼 보일 때가 많은 물리 시간이었다 .
“우주야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네가 물리과목과 함께
연결 되어 있는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 했단다.”
“ 괜찮아 나에 대해 학문적으로 모르면 어떠니 그것은 학자들이 관찰하고 연구하는 몫일 뿐이야 너무 신경 쓰지마.
그냥 모르면 모르는 데로 살아 꾸준히 접하다 보면 점점 더 나와 친해 질 거야.‘
우주는 환한 미소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답하며 응대해 주고 하늘엄마를 살며시 포옹해 주었다.
“오히려 하늘엄마 너처럼 그냥 편안하고 자유스럽게 인식하고 나를 꾸준히 생각해 주면 그것으로 한없어 고마워‘
“무슨 소리 야 내가 오히려 미안하고 고맙지.
너처럼 광대하고 끝없는 친구는 너 밖에 없잖아?
아니 천문학자들은 광대하지만 너도 끝이 있다고 하던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고 이해가 안되지만…”
하늘엄마는 진정으로 우주 그에게 사과하고 미안해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친구와 내가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이고 친구가 내 삶 안에 들어오고 내가 친구의 삶 안에 거한다는 동지의식의 발로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한국인의 정서와 의리였다.
그래 한국인은 지조 와 절개 의리와 충효를 명예처럼 그리고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며 살아온 민족이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그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은 곧 의리의 또 다른 표현이고 충성과 추상성의
상징이었다.
우주는 하늘은 너는 우리민족의
신(神)이며 전설이며 신화요 아버지 그 자체였다.
태양이 없으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듯이 우주 없이는 우리는 존재 가치가 소멸 되는 것 뿐이었다
오늘은 제1 장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뒤로 물리고 제 7장 하늘 엄마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보겠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렸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우주
2.
지구
3.
생명
4.
인류
5.
세계사
6.
한국사
7.
하늘엄마
8.
세계정부
맺는 말
그런데 1장 우주는 천문학적 지식이 상당히 필요하고
2장은 지질학 지식을 필요로 하고
3장은 생물학적이 지식이 필요하기에
우선은 쉬운 제 주변 사물부터 이야기를 하면서 추후에 1장과 2장 3장을 완성시켜
보겠습니다.
6장 한국사는 지금 계속 한국
문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역사 이야기를 문화와 함께 병행해서 서술하여 보겠습니다.
이것으로 6장은 대체가 될 것 같습니다.
5장 세계사 이야기는 한국문화사를
이야기를 마친 후에 천천히 할 예정이며 그와 함께 4장 인류에 발자취 이야기도 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사 이야기는 제가 학창시절 국어시간과 함께 가장 즐거웠던 이야기 시간이었으며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과거를 조망하며 음미 할 줄
알아야 현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하며 창조 할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항목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8장 세계정부 이야기는
저의 오래 된 아이디어로 앞으로 우리의 세계정치 경제를 조망해 보면서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처럼 저 역시 현대판 메시아를 세계정부
수립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현대판 춘추 전국 시대 같은 세계 정치 경제 상황에서는 많은 혼란과 전쟁 테러 기근 환경 오염 및
심각한 빈부 격차로 인한 갈등 유발 등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판 칭기스칸이나 진시황이 등장해서 천하를 통일해야 문제가 좀더 해결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미륵사상이고 샤머니즘 식으로 표현하면 정감록에 나오는 정도령 사상입니다,
그래서 세계정부 수립을 기대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부정적인 측면에서 돈키호테 식 사고 일수도 있다고 봅니다
추후에 제 생각과 사상들을 정리하여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7장 하늘엄마
우선은 제 이름인 하늘엄마를 통하여 바라본 세상에 대한 시각을 하나 둘씩 풀어 보겠습니다.
지난 유월 달 夏至(하지)를 동반한 여름이 어김없이 우리 곁으로 찾아 왔네요
제 60번째 생일도
함께 덩달아 따라 왔습니다.
환갑(環甲)을 맞이하는 나의 마음은 그지없이
참담하기도 하며 찬란한 무지개 빛이 영롱하게 빛나기도 합니다.
回顧(회고)해 보면
돌이켜 보면
좌절과 갈등 고통 번민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세월이 아니었나 자문해 봅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쓸쓸하고 황량한 平靜(평정)심 뿐인데...
그렇게도 지긋지긋 했던 입시 트라우마도
애틋했던 첫사랑의 상처도
뜨거웠던 雲雨(운우)의 情(정)도
어릴 적 동네에서 차임 벨이 울리면 놀던 것 다 뿌리치고
교회로 뛰어갔던 동심 어린 신앙도
무지개를 좇기 위해 애쓰던 稚氣(치기)도
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직
삭막한 벌판 위에서 울부짖는 늙고 초라한 늑대의 울부짖음만
투영 되는데...
이제야
.어처구니없게도...
사물의 의미를 십 년이 지나서야 알고 인생의 의미를 60甲子(갑자)가 다 흘러가 버린 다음에야 알 듯도 합니다.
허허로운 苦笑(고소)가 나옵니다.
다시 한번 인생과 대화를 또 시작합니다.
“안녕 잘 있었니 ?
내 이름은 하늘 엄마.
너의 이름은 인생.
너는 누구니 그리고 어디서 왔니?”
인생은 이렇게 답합니다
“ 응 나는 나야 !.
나는 너와 함께 같이 가는 친구야.
네가 힘들고 외로울 때 너를 위로하고 너를 보호하며 너를
감싸는 동반자야
나의 의미는 ‘하늘은 푸르고 땅은 누렇고 세끼의 밥을 먹는 것으로 족하다’이지”
“그래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젊은 시절부터 하곤 했지. 너를 만나면 물어 보고 싶었어 무던히도…
그래 이제야 너와 만나 마주 대하니 속이 후련하다!
과연 너의 의미가 무엇인지
?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방황하며 좌절해야만 했는지 묻고 싶었어 너에게..”
“응 잘 했어 어린 이이들은 싸우면서
크듯이
인간은 나에게 물으면서 성장하는 거야.
호기심이야말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고 나를 만나는 통로요
지름길이기도 하지.”
“그래 너야말로 수수께끼이고 신기루며 무지개구나.
이제야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내 곁으로 다가와 미소 짓고
있구나.
너는 할말 없니”
“나도 할 말이 많지 .
흔히들 나를 원망하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야
원래 내 구조가 그래서 그런 것이야.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도 표현하고 능력이라고도 표현하지.
네가 나를 기대했던 것처럼 나도 너를 기대하고 있어”
“뭐 네가 나를 기대하고 기대하고
있다고?
“응 정말이야. 나 역시 너의 성취와 분발을 응원하고 있지”
“정말 그렇니?
천지가 요동 칠 코페르니쿠스 적 전환이구나”
“그래 나는 결코 너의 나쁜 친구가 아니야.
단지 네가 나를 나쁜 친구로 만들고 있을 뿐이지
내면적인 만족을 모르고 외부에서 무지개를 찾아 헤매기만 해서
그렇지”
“그래 좋아 내가 너를 통해서 겪어야만
했던 시간들을 너에게 다 이야기
해 주지 너도 네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달라질 수 있을 걸…”
“그래 한번 들어 보자!”
7장-1절 : 하늘 엄마의 집안 이야기.
7장-1절 : 하늘
엄마의 집안 이야기
인생 친구를 만나 그 동안의 체험했던
이야기를 뒤풀이 삼아 하나씩 둘씩 회포를 풀어 봅니다.
“우리 집은 평양이야 즉 모란봉과 을 밀대가 있는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동네이지.
흔히들 우리 나라 속담에 ‘자기가 싫은 면 평양감사도 안 한다’는 말이 생겨 날 정도로 누구나 가보고 싶은 색향이기도 해.
그러나 반골의 땅이기도 하지.
역사적으로는 고조선이 있던 땅이고
그 후에 고구려의 수도이기도 하고 고려 때나 조선 시절에는 제2의 수도이기도
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지.
그리고 중국을 향해 저항하는
반골의 정신이 충만한 곳이기도 하지.
지금은 그 방향이 미국으로
향해서 문제가 되긴 하지만…
좌우간 역사적으로 가 볼 한한 땅이야.
그 유명한 한(恨) 많은 대동강이
흐르고 있는 땅이기도 하지
‘모란봉 전차역 첫 번째 집이며
그 곳이 사거리로 100평정도 된다’고 작고하신 아버님께서
말씀 하시곤 하셨지.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꼭 평양 우리 집을 방문해 보라고 유언을 남기고 가셨어.
나 역시 살아 생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세월이 워낙 하수상하니 어떨지 모르지.
내가 못 가면 우리 외동딸에게 꼭 가보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기고 있어.
물론 조카에게도
계속 간혹 이야기를 주입시키고 있어.
나의 집안 역사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자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나의 사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책무 일수도 있다고 생각해.
또 논리적인 비약이겠지만
유태인들처럼 조상들의 고통과 좌절을 알아야 또다시 그런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지.
또 장황해 졌구나.”
“그래 좋아 재미있겠는걸 .
한번 집안의 뿌리부터 내력부터 천천히 재미있게 이야기를 전개
해봐.
서둘지 말고 편안하고 자유스럽게 쉽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교훈을 동반해 가면서…
하늘 엄마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인생 내가 너를 기대하고 있어
그냥 말을 해봐.
자연스럽게”
“우리집안은 큰아버지와
아버지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탱크를 몰고 남침한
6.25 한국 전쟁 동란 중에 평양에서 구사일생으로 피난을 내려 왔어
그 이야기부터 시작 할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집안의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부터 해야 순서겠지…… 자 들어봐 이 이야기는
어머니로부터 어깨 너머로 들어 온 것들이라
조각 정보들을 모자이크 식으로 짜깁기 해서 만들어 낸 이야기야.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아서 종합적으로 상상력을 조금 보태서 이야기를 풀어 볼게.
왜냐하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두 분다 평양에서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평생 본적이 없어 .
단지 아버지와 큰아버지 할머니 초상화가 안방에 있었거든 그래서 상상의 날개를 펴고 할머니를 만나러 가곤 했을 뿐이지..
우리 할아버지는 전설 속의 인물이라 우리 아버지도 얼굴을 모르고 자라나셨어.
아버지도 한(恨) 많은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셨지…
그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질곡의 삶을 겪어야만 했겠지만…
원래 우리 본향은 평양이 아니고 평양에서 동북방향으로 위치에 있는 성천군이야
우리 집안의 할아버지께서는 농부가 아니면 선비 또는 식당에 식품재료들을 납품하는 도매상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누구 이야기가
맞는지는 모르고 있어 아니면 둘 다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집안의
내력을 미화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가감 없이 전달하고 기술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고 인간 본연의 정신 일수도 있다고 봐.”
“그래 요즈음 자서전들이나 회고록들은 친일파들도 독립군으로 둔갑시키거나 애국자로 미화시켜 회고록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지.
이미지 메이킹을 화장시켜 다른 인물로 미화시키는
짓을 밥 먹듯이 하고 거짓말로 윤색해 무슨 위인이나 되는 것처럼 신화적 인물로 만드는 세태니까…”
“내가 자라면서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우리 친 할머니가 무척이나 여장부이었고 괄괄하셨다고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어.
또한 샤머니즘을
좋아해서 집안에 신상들을 간직하며 아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옛날에는 누구나 잡귀를 내쫓고 부귀 영화를 원했기 때문에 그랬을지 모르지 .
지금도 현대인들의 황금만능주의와 일맥상통하겠지만…
인간들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또한 은밀한 사실중의 하나는 우리 친 할아버지에게 할머니를 후처 자리로 들어 앉혔다고 들었어.
할머니께서는 자식을 5명이나 전 남편으로부터 낳았다는데 어떻게 후처로 다시 재가했는지도 의문이야.
그런데 5명이나 애를 낳고도 어찌해서 후처로 재가를 하셨는지는 미스터리야
그 당시 풍습과
정서로는 일반적인 상식 수준이었는지도 모르지.
좌우간 어떻게 전 처와 자식들이 있는
할아버지와 자식이 5명이나 있는 할머니가 다시 결혼하시겠는지도 궁금해..
평양에서 피난 내려 오신 큰형의 말로는 도매상으로 식당에 식품을 납품하다가 눈이 맞아 결혼하셨다고 그랬어.
그런데 옛날에도 자유스럽게 결혼을 했을까?
그 당시에는 누구나 자녀를 10명정도는 기본으로 낳았으니까..
물론 그 중에서도 많은 애기들이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또한 피임도 할 수 없고 자연 순산을 일반적으로 생각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지…
지금처럼 하나 낳아 기르기도 벅찬 세대와는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그래 지금과 너의 할머니가 사셨던 19세기와는 격세지감(隔世之感)으로 사뭇 모든
정서와 환경이 판이하게 다르겠지.”
“ 만물은 변하는 거야 .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것이 인생이야.
흐르는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고 핵심인 것 같아.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 할머니의 아버지가 고관 대작 부잣집이었다는 전설이 있어 .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가 부잣집 딸이었다는 이야기지.
왜 부잣집 딸이 후처로 들어 갔는지도 미스터리이고 할아버지가 없이 과부의 집안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도 역시 우리 집안에서 회자 되고 있어. 그러니까 할머니 큰아버지 아버지 세 식구가 힘들게 평양에서 사셨다는 거야.”
“옛날에는 그 당시 누구나 후처나 첩을 들이는 것이 상례화 되어 있었던 것이지.”
“그래 그래 첩을 들이는 것이 관행이었나 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할머니의 아버님께서 우리 할아버지를 건달로 취급하며 안 종아 했다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어”
“왜 안 좋아 했는데?”
“이유가 가난해서인지 혹은 건달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장인(우리
할머님의 아버지)께서 고관 대작이어서 그런지 전혀 추측되는 바가 없어.
단지 정서적인 느낌으로는
남의 집 귀한 딸을 후처나 첩으로 데려 간다는 사실에 기분이 몹시 상하거나 자기의 체면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했겠지..
혹은 그 당시 시대 정서가 후처로 자기 딸을 시집 보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좌우간 사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왜 고관 대작의 딸이 후처로 순사한테 시집갔는지도 이해가 안 되지만…
그러나 할머님께서는 큰아버님과 아버님을 끔찍이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즉 평양에서 돌아가시기 까지 두 아들들을 의지하며 사셨다고 들었어.”
“너는
할머니를 전혀 본 적이 없니?”
“응 나는 전혀 할머니를 본적도 없고 단지
안방 문갑 위에 오롯이 세 식구가 그려진 초상화롤 통해서만 볼 수 있었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척들을 모르고 자랐으니까 친척 개념이 희박했겠네?”
“그래 친척의 족보도 모르고 자랐고
조금 가족간의 정이 옅다는 것을 결혼을 하고 난 후에야 알았어.
. 어릴 적에는 당연히 일상적인 일이라 모르고 지내 왔지.
특히 큰아버님께서는 평양에서 초등학교를 나오셨는데 학교 다닐 때 항상 성적이 우등을 하셔서 상과 함께 많은 칭찬과 애정을 할머님으로부터
독차지 했다는 이야기를 어머님으로부터 듣고 자랐어.
그러나 우리 아버님께서는 안타깝게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셨던 것 같아.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워낙 가난하셔서 둘째 아들은 학교에 못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라고 하셨지.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엄청난 사건이지만 그 당시 풍습으로는 다반사였어.
오히려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만 해도 사치였고
감지덕지로 생각해야 하는
시절이었지.
1920년대의 당시의 눈물겨운 시대상이었지…
사족이지만 사촌 형이 공부를 잘 한 것은 큰 아버님을 닮아서 그런 것이라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곤 했어”
“혹시 평양에서 있었던 비사(秘事)도 많이 있을 텐데 …”
“차차 그런 우리 집안의 비사(秘史)이야기도 할께
마음이 급해지고 웬지 부끄러워지는구나.
과연 우리 집안 이야기를 세상에 공표해야 하나 하고…
왠지 쑥스럽고 부끄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그냥 우리끼리 얘기를 해봤지 인생 너에게까지 이렇게 다 야기하리라고 생각을 유보해 두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
언젠가는 나에게도 나의 인생 여정을 이야기 하고 싶었거든 .
그래서 세상 밖으로 튀어 나가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좀 더 좌절과 고통으로 가득 찬 우리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자기 스스로
만든 창의적인 길을 찾았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상념에서 이야기를 너에게 하는 거야..”
“고마워 나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 줘서..
누구나 저마다의 짐을 지고 인생길을 걸어 갈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겠지..
좀더 지혜롭고 스마트한 삶이 되기를 바랄 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어릴 적부터 많이
놀아보고 많이 책을 읽어 보고
많이 주위 사물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이 서술해보는 것이 좋아.”
“그래 인생 너는 지혜자이며 종결 자이구나.
많이 나에게도 알려줘 너의 지혜와 지식과 삶의 의미를…”
우리 집안의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있다니
아무도 관심이 없는 이야기들이라 또한 자랑스럽지 못한 집안 내력이라서 그런지 다들 덮어 두려고만 하는데...
그냥 마음속 깊이 심연 속으로만 전수하려고 했는데…
물론 누구도 관심을 보이는 않을 수도 잇겠지만…
뜻밖에 네가 관심이 보이다니 단기(單騎)로 싸우다가
백만 원군(百萬援軍)을 만나는 것
같아 흐뭇하기만 해.
아마 10년 전 이나 20년 전 쯤 되었겠나 우리
집안의 역사가 궁금하여 종로에 있는 동대문 시장에서 복덕방 하시는 이복 형님에게
우리 집안 내력에 궁금하여 여쭤 본 적이 있는데 무척 당혹해 하셨으며 그 사건이 아버님 귀에도 들어가 자식이 아버지 뒷조사나 하고 다닌다고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새로워 .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인데 지금도 나의 뇌리에 각인이 되어 있다니…
슬픈 자화상이야..
물론 아버님과 큰 아버님은 후처의 자식이고 이복 형님은 본처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지.
다 커서야 족보 관계도 알게 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조선은 양반제도로 인한 신분제도가 엄연히 존재했고 서자들을 차별하였기에 조선의 정서가 그대로 답습되어 큰아버님이나 아버님이나
이복 형님께서 함구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어릴 적부터 느껴온 아픔이나 고통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으려는 보호 본능이 있는 법이지요.
“할머니 모습이 자못 궁금해 한번 뵙고 싶은데…
어떤 분이셨는지…
손자라 무척 귀여워 해 주셨을 텐데…
그렇게도 큰아들만 애중중지 키우셨고 작은 아들에게는 냉대를 하셨는지…”
이 정도로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습을
대강이나마 스케치해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 아버지와 큰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평양 결혼생활 이야기를 소묘해 보겠습니다..
덧붙임:
혹시 중고생들을 위하여 사전을 찾아 단어의 뜻을 올립니다.
요즈음은 한자를 배우지 않아 생소한 단어인 것 같아서 이렇게 단어풀이를 해 봅니다.
참고하시기를…
색향색향 [色鄕]
- 색향: 미인이 많이 태어나거나 기생이 많은 고을
- 반골 1.권력이나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기개
- 2.쉽게 다른 사람을 따르거나 복종하지 않는 기질
- 구사일생 주로 ‘구사일생으로’의 꼴로 쓰여, 아홉 번 죽을
뻔하다 한 번 살아난다는 뜻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고 겨우 살아남을 이르는 말
황금만능주의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나 태도
- 비사 밖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내지 말아야 할 일 또는 사건
다반사 차
마시는 일이나 밥 먹는 일과 같이, 일상에서 늘 일어나 대수롭지 않은 일
- 감지덕지 1.과분한 듯하여 아주 고맙게 여김
- 2.과분한 듯하여 아주 고맙게 여기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 백만 원군: 백만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전투에서, 자기편의 싸움을 지원한다는 뜻입니다
단기 : 홀로 말 한 필로 싸움을 한다는 뜻입니다.
- 애지중지 매우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 냉대: 정이 없이 차갑게 대함
제7장
2절 평양시대
지난 번 7-1에서는 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잠깐 다루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저의 부모님들의 평양 시절의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평양시대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그전에 우리는 평양 땅이 어떤 땅인가를 개괄적으로 조망한 후에 우리 집안의 평양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역사적 순리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 평양 땅에 대한 제 역사 지식을 나열하겠습니다.
지도 책에서 평양을 들여다 보면 평양 땅은 한 가운대로 대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서울이 한 복판으로 한강이 흐르고 있듯이...
중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최초의 우리 민족이 B.C 2333년에 세운 나라인 세운 고조선을
이야기 하면서 그 당시 민중들에게서 구전으로만 전래되어 내려오는 단군왕검 신화를 이야기 합니다
즉 어느 날 환인이 자기 아들 환웅에게 지상으로 내려가 새로운 신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명합니다
그래서 신하 3000명을 이끌고 태백 神市(신시)로 내려와 고조선을 건국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태백 신시가 압록강 근처 도시라는 사람도 있고 평양이라는 사람도 있고 만주의 어느 강가근처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처럼 평양은 유구한 역사와 동북아시아문명의 중심지요 젖줄입니다
인류최초로 4대 문명이 큰 강가에서 일어났듯이 동북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로 대동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 후 BC 2333년에 새워졌던 고조선은 BC108년
중국 한나라에게 멸망 당하는 비운을 맞이합니다 그 다음에 BC1세기 경 고구려 궐 백제 신라 등 많은
동북 아시아 나라들이 세워집니다 처음에는 고구려가 만주 압록강 근처에 있던 졸본 성과 압록강 근처 집안의 국내성에서 수도가 생기지만 광개토 대제
이후 주위 만주 땅을 다 평정시킨 이후에는 장수 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대동강은 상무정신을 충만한 반골의 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결코 명멸하는 중원의 중국 나라들에게 굴복 하지 않고 동북아 패자로써 자기 년호(年號)를 쓰며 천하의 중심처럼 무인정신을 온 천하에 떨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과 마찰 할 수
밖에 없고 중국의 수 나라와 싸워 멸망 시켜 버리고 다음 번에 중국 당나라와 여러 번 싸워 승리하기도 하고 끝내는 멸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발해와 고려와 후 금과 청을 세워 중국과 겨루며 중국을 다시 굴복시켜 청나라를 건설 하기도 합니다
그 중심에 평양의 대동강이 있다고 생각 됩니다. 조금은 역사적 비약이겠지만...
만주로 가기 위해서는 분명히 대동강을 건너야 하고 평양을 지나가야 하기에 숱한 전란의 화마에 휩싸이기도 하고 조선시대에는 유배지의 땅으로
반역의 땅으로 천덕꾸러기의 경계의 땅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좌우간 고려 시대에는 묘청의 난으로 조선조에서는 홍경래 난으로 항상 혁명의 땅으로 인식 되게 됩니다.
지금도 대동강 물은 마시는 평양사람들은 미국의 가시로 여겨지게 되고 중국인들에게는 골치 덩어리로 여겨지는 것과 일맥 상통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랑스런 尙武(상무)와 反骨(반골)과 氣槪(기개)의 땅이네요
역사 속에서 선 과 악은 없고
문명 속에서 우열이 없듯이
서로 다름과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럼 우리 가족이야기로 돌아와서
저의 아버지께서는 소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즉 1930년경 신 문물로 근대화의 여명이 밝았던
평양 땅을 밟게 됩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일인들이 많은 상점을 소유했고 우리 나라 정치경제를 쥐락펴락 했겠지요
지금 시각으로 봐서는 그 일본인 밑으로 들어가서 점원 생활을 한다는 것은 치욕적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그 당시 시각으로 봐서는
그렇게 찬밥 더운 밥을 가릴 게재가 못 되었을 것으로 가난의 절박함이 묻어 있는 고난의 일제 강점기였습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삼성이나 현대 사원으로 들어간 것으로 치환해서 생각한다면 무난하리라 사료됩니다.
아마도 평양시내는 그 당시 할머님과 아버지 등 시골 사람에게서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휘황찬란한 전기 빛이 들어 오는 평양의 밤거리는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인맥을 통해서 근처 일인 상점에 취직되어 할머님을 모시고 평양 어느 변두리 구석 단칸방을 구하고 평양 생활을 시작 했습니다.
평안 남도 성천군에서 자란 아버지는 시골과 대도시 평양은 하늘과 땅 차이 만큼 신천지였고 청운의 꿈을 키우기에는 벅차고 안성맞춤의 도시였으며
피 끓는 청춘에게는 청년 드림의 땅이었지요.
월급은 일인 상점 주인들에게 받은 쥐꼬리 만한 월급봉투였지만 아버지는 큰
희망과 포부를 가집니다 .
왜냐하면 그 당시로써는 일인 사장으로부터 갖은 수모와 멸시 천대를 받아 가면서
혹사를 당하지만 최첨단 상점경영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철저하게 일인상인 밑에게 경영수업을 혹독하게 받게 됩니다
또한 미소년이었던 아버님께서는 언젠가 종자돈을 모아 상점을 차려 몰락하기만 했던 우리 집안을 다시 부흥시켜 일으키겠다는 힘찬 포부를
점원 생활을 하면서 가지게 됩니다
사업 밑천을 모아 상점을 차리고 사업도 크게 일으켜 집안도 세우고 소위 요즈음 말하는 젊은 벤처 CEO로
거듭나리라고 당찬 결의를 합니다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서러운 가난의 사슬을 끊고 얽힌 질곡의 사슬들을 끊어 버리며 훨훨 풍요의 세상 속으로 날개를 활짝 피며 비상하리라 다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린 청년에게는 녹녹하지 않아 우리가 쓰는 말대로
‘쉽지 않은 전투’이었습니다 .
우리 집안에 회자(膾炙)되는 재미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어쩌면 재미 있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슬픔의 떼가 묻어 있는 애환의 이야기이겠지요
일인 상점 주인은 항상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라고 이야기
하곤 했답니다.
그리고 “장사꾼은 ‘아싸라’해야 한다”
일본 문화적 표현이지요.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섬에 갇혀 살다 보면 서로 부대끼는 일들이 많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를 항상 조심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국까지
흘러 들어 왔나 봅니다.
아버지는 항상 이 말들을 교훈 삼아
마음속에 담아 두나 보니 ‘저 사람은 ’보증
수표’라는 별명을 듣고 싶어했고 남들에게 신용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세월이었다고 술회하고 했습니다.
아마 그때가 다시 표현하면 1930년부터 1951년
1.4후퇴 때 미군 군용 트럭을 타고 홀로 도망하듯이 내려온 시기까지 즉 평양에서 산 약 20년간의 평양생활이 일생 중 할머님을
모시고 효자로써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후 6.25 동란 후로부터는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물거품이 되어 버리지만,,,
그렇지만 여기에서 아버지는 상인으로 거듭나면서 우리 집안에 그 동안에는 없었던 새로운 피가 수혈되기 시작합니다.
즉 우리 집안의 귀중한 상인 정신이 발아하기 시작합니다.
가끔씩 하늘엄마 몸 속에는 우리의 유전인자 DNA는
선비정신과 상인정신이 느껴 질 때가 많습니다.
선비라는 토대 위에 상인이라는 가지를 접목 시키어
그 후 평생토록 상인으로써 유감 없는 삶을 사셨던 것도 소학교 졸업 후 배운 상점 교육 덕택이라고 생각 됩니다.
물론 아버지는 선천적으로 선비정신이라는 뛰어난 능력을 배경지식으로 갖고 태어난 것도 큰 행운이라 하겠지만...
넓게 보면 이 모든 것이 것이 우리 조상들의 음덕이라 생각 됩니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이렇게 편안하고 즐겁게 부유하게 유년시절을 보내고 대학 교육까지 받게 되고 평탄하게 사는 것도 아마 우리 부모님들의
끈질긴 상인정신과 선비정신의 또 다른 발현이라 여겨집니다
이때 만약 그대로 아버지께서 평양으로 와서 취직하지 않고 평남 성천에 계셨다면 하늘 엄마는 아마 평범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북한에서
살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처럼 전략적인 아버지 머리와 판단은 계속해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럼 아버지의 결혼이야기를 사랑이야기를 해야겠군요..
7장3절 부모님의 로맨스
부모님들은 다 돌아 가셨지만 그들의 로맨스는 하늘 엄마에게는 항상 메아리로 남아 있습니다.
얼마나 살면서 자주 들어야만 했던 잔소리이며 유훈이며 사랑의 종소리였던가!
내용은 이러합니다.
1940년쯤 평양에서 살고 계시던 친 할머님께서는 중매쟁이를 시켜 며느리를 얻고자 수소문합니다.
드디어 평원군 어는 고을에 참한 색시를 알고 있는 평원군 중매쟁이와 평양 중매쟁이가
서로 연결이 되어 중매로 이야기가 오고 가고 드디어는 부모님께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 보면 기막힌 사연이 들어 있습니다.
평원군은 그 유명원 을지문덕 장군이 태어난 고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당시는 지금처럼 남녀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는 자유 결혼이 아니라 중매쟁이들이 서로 연결해
주는 중매 결혼이라 서로의 가문에 대해 모르고 혼인을 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저희 부모님 역시 서로를 모르고 혼인 하게 되어 서로의 얼굴을 혼인하는 날 보는 되는 구식 결혼을 하게 됩니다.
혼인 성사가 무르익어 가는 어느 날
하루는 큰 아버님과 저희 아버님께서 사주 단지를 들고 처갓집에 혼인날짜를 받기 위하여 평원군 고을로 갑니다.
날씨는 봄날이라 산에는 진달래가 피고 평양 시내는 벚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처가가 사는 평원군 영유 고을은 널직한 과수원으로 산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만발하였고 사과와 배나무의 잎새들은 한창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저희 외가를 찾아
가기 위한 발걸음이었지요.
옛날에는 결혼식을 하기 위하여서는 한문으로 쓰는 결혼 혼인 서약서 같은 증서가 있다고
전해 집니다.
물론 그 서약서는 다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에 아버님께서는 한문을 잘 쓰는 전문가를 대동시키고 갑니다.
그때 아버님께서는
장인 어르신이 되실 저의 외할아버지를 처음 만나게 되고 장인 어르신께서 한문을 많이 아시고 글을 잘 쓰시는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큰 과수원을
갖고 있는 그 고을의 지주이며 선비 집안의
장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보시고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는 젊은이가 사위로 찾아 왔음을 알고 몹시 당황하며 언잖아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으로 얻은 아내를 빗자루로 때렸다고 합니다.
“ 이것아 네가 중매쟁이를 잘못
써서 이 혼사를 망쳐 버렸어!”라고 탄식 하시면서…
얼마나 세게 때려는지 머리에서 피가 나며 어머니의 계모이신 두 번 째 부인께서는
“일본 경찰에 가서 고발하겠다”라고 항의했다고 하네요.
그 당시 상황으로써는 일어 날 수 있는 해프닝 입니다.
또한 외할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 말씀하시기를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네가 시집가서 잘 살면 되는 것이야!”
라고 어머님께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후일담이지만 “ 큰아버지가 내 사위였으면 좋겠구나.”라고
아쉬워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외할아버지께서는 아버님보다는 저희 큰 아버님께 후한 점수를 주었나 봅니다.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맞선을 볼 때
“절대로 둘이 가면 안 된다. 혼자 나가야 한다 비교가 되니까..” 라고 하시곤 했지요.
또한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 옵니다.
또한 어머니의 친어머니이신 외할머니께서는 평원군에서 소문난 미인이라 어느 날은 외할머니께서
시내에 볼 일 이 보러 갔다가 어느 일본순사가 외할머니의 미모에 반하여 집까지 좇아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할아버지께서 “이 여자는 내 아내이오. 다시는 오지 마시오”라고 집 밖으로 쫓아 냈다는 유명한 일화도 남기고
있지요.
그만큼 외 할머니의 미모는 남남북녀처럼 평원군 고을에서 알아주는 미인이셨나 봅니다.
꿈속에서라도 한번 뵈었으면 좋으련만…
그리하여
곱게 자란 부잣집 딸과 가난하고 어렵게 자란 아들과 처음부터 격에 맞지 않는 신혼 살림을 평양에서 차리게 됩니다.
평양 신
거리는 휘황 찬란하고 눈에 부시는 풍경이었지만 막상 살게 되는 신혼 집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셋방살이 집이었지요.
그래서
하루는 어머니께서 친정 고을로 가서 외할아버지께 “아버님, 도저히
평양에 있는 단칸 방 셋집에서는 살 수가 없어요. 너무 가난하여 먹고 살기도 힘들고 삭 바느질 까지
하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 정도로 고달파요”라고
하소연
하니 외 할버지께서는 “그럼 내가
집을 한 채 사줄 테니 사위와 따로 이사하여 신혼 사림을 꾸려보거라” 서로 격에 맞지 않은 결혼으로 인해 장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감추시지
못하는 할아버지께서는 잘못된 결혼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선뜻 집을 한 채 사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시어머니께서는 “분가 시켜 줄 수는 없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안 된다. 나 죽거들랑
분가하거라.”라고 잘라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모란봉으로 점포가 세 개나 있는 100평 정도의 큰 집으로 친할머니를 모시고 이사를 가게
됩니다..
또한 평양시절에는
어머니의 낭만적인 영웅덤도 잇습답니다.하루느 휴일이라 모처럼 시내로 나가 마케또에 가서 쇼핑도 하고
맛있는 음시도 먹자고 亞버尼믄李한복으로
단장하고 꾸미고 나오니
아버님은
“영보 너무 화사하지 않아 조금 허름한 옷을 입고 나오지 그래야 나와 격이 맞을 것 같은데…”
어머니의
젊은 시절의 미모는 꼬브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카다란 커다란
자랑거리인가 봅니다 .
그러나 6.25동란으로 인하여 그 집은 미군 B-29 폭격으로 많이 부서지게
되고 그마저도 피난으로 인해 영영 그 집과는 이별하는 비운을 맞이합니다.
그렇지만
부모님께서는 6.25 전쟁으로 인해 잠깐 남한으로 피난은 내려 오지만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하는 38선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물론 북한은
장사꾼에게는 상극이라 살 곳이 못 되고 공산당 싫어하는 기독교 집안이라서 집과 재산은 모두 남겨 놓은 채 몸만 달랑 남쪽으로 피난을 올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지만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줄을 꿈에나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38선이 원수야!”라고 되뇌시는 어머니의 살아
생전 모습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안녕 대동강!
잘 있어
모란봉아!
너를 평생
못 잊을 거야!
대동강
물을 마시며 어린 잔뼈가 굵었고 모란봉을 남산같이 바라보며 꽃다운 청춘으로 피어 올랐는데 이젠 영영 이별이구나
!
잘 있어
대동강
잘 지내
모란봉”
어머니께서는 6.25시절 1.4후퇴 때 얼어 붙은 대동강을 건너며 작별 인사를 고합니다.
부모님은
그렇게 한(恨) 많은 대동강과 모란봉을 살아 생전에는 다시 가 보지 못하고 끝내 운명하셨습니다.
한번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시내로 나들이 하러 가는 날 아버님께서는 어머님에게
“여보 당신이 화사한 한복을 입고 나가면 너무 고와서 다른 사람들이 다 쳐다 보니 좀
허름한 옷으로 입고 외출하오. 그래야
나와 어울려서 다른 사람들이 쳐다 보지 않을 테니까.”
라고 하셨다고
어머님께서는 항상 당시 젊은 날의
미모를 그리워하며 자랑하곤 하셨습니다.
자 그럼
다음 시간에는 부산 피난민 시절을 스케치해 보겠습니다.
7장 4절 부산 피난민 시절
부모님께서 빈 몸을 가지고 갖은 위험을 무릎 쓰고 우여곡절 끝에 피난 내려온 부산
국제 시장은 글자 그대로 미국에서 수송 되어온 온갖 종류의 구호 물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피난민들의 생활 터전이 되었습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듯이 모든 물자와 사람이 교류하는 곳은 부산 광복
동과 남포 동 옆에 있는 국제
시장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영화 ‘국제시장’에서의 풍경처럼 헐벗고 굶주린 피난민들이 내려와서 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 물자와 대마도나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
들어오는 밀수품으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던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 장터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버님께서는 평양 시절부터 배은 장사 기술로 인해 쉽게 점포를 구하고 온갖
구제 물품들을 팔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일이 시작 되면서 우리의 주인공 하늘 엄마도 이 시장 바닥에서 운명적으로 태어납니다
사람이란 우연과 필연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이란 이렇게 자기의 선택과 결정과 상관
없이 부모님에 의해서 인생이 주어지나 봅니다.
운명애(運命愛)를 느낍니다.
.하늘엄마 역시 평생 이 국제
시장의 인연과 크게 벗어나거나 다르지 않게 성장하고 일을 하며 삶을 영위해 가게 됩니다.
삶이란 참으로 미묘한 것이어서 인연을 등에 업고 국제시장에서 태어났습니다.
훗날 하늘 엄마는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지요
“엄마 내가 태어날 때 태몽을
꾸었어?”
“응. 네가
태어난 날은 무척 더웠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너를 만나야 했거든 .
그날은 하지(夏至) 였어. 1957년 닭 띠 해였지 .”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이이를 가졌을 때 동해에서 찬란한 빛이 들어 와 신사임당의 몸 속으로 들어 갔다는
전설이 있는데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신화 같은 이야기일수도 있겠습니다..
그에게는 국제와 시장이라는 상직적인 시장 바닥의 태몽이 평생 따라다니게 되지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처럼…
그러나 하늘엄마는 전혀 부산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나지 않습니다.
고작 세 살 때 부모님에 따라 손잡고 아장아장 걸으면서 서울 동숭동 대학로 옆에 있는 한옥집으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부산은 마음의 고향이고 단지 태어난 베들레헴에 불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행이 유아 때 부모님들이 찍어 두었던 퇴색되어 색이 바랜 사진 더러 남아 있어 그 시절의 초상화를 아련하게 그리고 있지요.
지금 부산이야 100층이 넘는 고층 빌딩들이
밤 바다를 수 놓아 멋진 항구 도시가 되어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정부가 북한군에 의해 쫓겨간 마지막 보루와 같은 절재 절명의 피난처였지요.
아랫 사이트는 1950년대 피난민 시절의 국제 시장 모습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JOMnN6lVnI&t=70s
7장 5절 전쟁 후 서울의 어릴 적 풍경과 초등학교 시절
1950 년.6 월 25일 일요일
북한 김일성은 그 당시 남로당 당수인 박헌영을 앞세워 남침을 하면서 한국동란을
일으킵니다.
그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한이 거의 다 불타고 파괴되어 초토화 되는 비운을 맞이 합니다.
1960년대는 한국 전쟁 휩쓸고 간 전쟁 후유증의 화마로 인한 피해가
상상을 초월하는 그 폐허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625 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어느 외국인은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필 수 있을까!’라고 악평을 하곤 했지요.
적화통일이라는
미명아래 한반도 내에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지요.
박헌영과
김일성은 역사 속의 전범들입니다.
330만 명이라는 사상자를 낸 아프고도 처절한
전쟁이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전범들 나오지 않기를 다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 되지 않기를 기원할 뿐입니다.
그런 참담한
속에서 하늘엄마는 60년대의 가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한 세월이었습니다..
어릴 적
혜화 국민학교 때 시절이 어렴풋하게 떠오릅니다,
서울 4대문 안에 있었던 혜화 역 근처 뒤 편에 자리잡고 있었던 동숭동 한옥집 마을, 동네의 좁았던 골목
, 혜화 국민학교로 가던 그 신작로길, 그 혜화동 로터리
분수대. 푸른 뒷동산 낙산, 건너편
이화동과 백동, 동네 교회 건물과 십자가 ,
차임 벨 소리와 한국 전쟁 이후에
태어난 어린이들이 뛰어 놀며 지르던 함성소리 등이 아련히 함께 떠오릅니다.
아아 우리
기쁜 어린 동심의 나날들
어린 유년
시절을 떠오를 때마다 느낀 가장 깊은 기억 속의 강한 감정은 매일 혜화 국민
학교에서는 시험을 치르곤 했습니다.
그와 함께
선생님은 말씀은 이어집니다.
“종이 땡땡 울리기 전 까지는 시험지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된다.”’
지금 환갑이
다 지나고 진갑 역시도 흘러 갔지만 국민 학교 때 선생님의 무섭고도 잔인했던 그 음성은 귓가에 계속 맴 돕니다.
인생이라는
시험지 위에다도 일분 일초 까지 줄 곧 눈을 뗄 수 없겠지요.
그 시험지가
이제는 소설로 치환되어 흰 종이 위에서 이렇게 춤을 추고 있는 지도 모르겠군요.
지금도
왜 어린 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은 매일 시험지를 나누어 주면서 시험을 보고 채점을 해야만 했는지 이해를 못하겠네요.
그 당시
선생님들은 하늘이었으며 몽둥이를 든 폭력배 조 폭 수준이었습니다.
어린 동심의
시각으로 봐서는…
선생님의
말씀은 법이었고 학교는 헌법 재판소였습니다..
그 당시 국민학교는 복종 이외의 다른 개념은 찾을 수도
없었고 찾아서도 안 되는 무서운 사관학교였지요.
오로지
명문 경기 중고등 학교에 가야만 하는 분위기가 그 당시 국민 학생들에게는 지상명령이었습니다.
그래도
국민학교 시절은 중고등 학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면이 있었다면 그래도 어린 동심이 꽃 필수 있는 낭만의 공간이 약간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동화책이나 위인전을 읽을 수 있는 여건이 허락 되었으며 또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좁은 골목길에서 다방구와 딱지 치기와 축구를 할 수 있었던 정겨운 시간 들이 허락 되었습니다..
교육에
관한 한 지금도 한국의 교육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겠지만…
국민 학교시절부터 입시 지옥에 시달리는 것은 하늘엄마의
시각에서는 거의 질식 수준에 이르곤 했지요.
학교 수업은
워낙 베이비 부머 세대라 오전반이
있었고 오후 반이 있는 2부제 수업을 들어야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3부제로
수업을 진행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게
어린 학생들이 너무 많아 교실이 모자라는 상황이었지요
지금은
인구 절벽 시대라 초등학교가 서울에서도 점점 줄어든다고 하는데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어린 시절
하늘엄마는 병약한 편이었지요.
그래서
잘도 넘어지고 감기에 잘 거리고 편도선 염에도 생겨나 열이 많이 나곤 했지요.
그러나
매일 시행되는 시험시간에는 예외가 있을 수도 없고 몸이 아파도 시험지를 안 받을 수 없는 그런 사관학교 같은 엄격한 불문 율을 지켜야 했던 곳이
어린 시절의 국민학교였지요.
시험지를
앞에 들고 바들 바들 떨던 어린
시절의 동심이 아직도 자라지 못하고 떠나
보내지 못하는 동심의 내면적인 아이는 지금도 마음속 깊이 살아서 웅크리고 있네요.
선생들이
기록한 생활 기록부에는 항상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내성적인 아이로…’
어린 시절에는
선생님들은 그냥 누구에게나 생활기록부는 그렇게 적는 줄 알았지요.
그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들이
흘러가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숱한 시간들이 지나가서야 깨닫게 됩니다..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수줍은 아이는 내면에서만 있고 튼튼하게 자라나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서 내면적인 동굴 안에 반골적인 아이로 깊이 틀어 박혀 있네요.
몸도 자라고
마음도 자란다고 남들은 말하곤 하는데 왜 유독 하늘 엄마의 내면적 아이는 심연에서 웅크리고 앉아 성장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국민학교는 어린아이들의 군대 훈련소였고 그곳에서 배우는 선생님의 가르침은 엄한 훈련입니다..
한번은
국민학교에 갓 들어가서는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 그리고 수줍어서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의자에서 대변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질러 버렸지요
열에 있던
아이들이 “야, 여기서 똥 냄새가 나…”
선생님도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하교하면서 똥 덩어리를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집으로 들어가서 엄마에게 이실직고
하니
예쁘게 한복으로 갈아 입고 외출 하시고자 했던
어머니께서는 화를 내시며 “왜
선생님께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말하지 않았어?” 라고 꾸중을 합니다.
‘그렇게 내가 용기가 있었으면 화장실에 다녀 왔겠지…’
내면의
아이는 다시금 반항심을 키워 갑니다.
그 속에는
이런 풍경도 숨어 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시절 어느 가을날 집으로 귀가하면서 들르던 혜화동 로터리 분수가 옆에 있는 미술학원에서 미술 선생님은 “애야 오늘은 도화지에 이순신 장군을 그려 보아라”
라고 어린
저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케치 실력이 없었던 하늘 엄마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는 그림을 요구한 것이지요.
난감한
마음으로 멍하니 앉아 서양 조각 상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정했던 미술 선생님은 다가와 친절하게도 노란색 색연필을 들고 피카소 저리 가라 수준으로
이순신 장군을 창조해 줍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흰 도화지 외엔 아무것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 없던 백지였건만 선생님의 마술의 손으로 이순신장군이 멋지고 힘차게 살아나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이 마법처럼 펼쳐집니다.
그 다음
색칠하기는 누워서 떡 먹기이지요.
그냥 좋아하는
예쁜 색깔로 즉 빨강색과 노란색 그리고 파랑 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색칠만 하면서 도화지를 메우면 족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미술 학원을 다니기 싫었던 낭만적 생활도 곧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엄격 했던 아버님께서는 그림 그리기에 관심이 없었던 저를 간파해 내시곤 도화지를
검열하게 됩니다..
도화지에는 미술 학원에서 그리다
말곤 도망쳐 나온 여러 그림들이 도화지 안에서 뒹굴며 볼품없이
나뒹고 있었지요.
결론은
뻔한 결말.
“당장 미술 학원 때려 치워!”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지금도
그 덕분에 미술관에 들러 그림들을 감상하곤 합니다..
어린 시절
그림 그리기란 그렇게도 싫었던
미술 수업시간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친근한 벗이 되어 곁으로 다가 옵니다.
만물을
변화듯이 세월 따라 마음도 적성도 취향도 변하나 봅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갑니다.
어린 시절의 악마가 이젠 노년을 바라보는 함께 가는
벗으로 둔갑해 버립니다..
어린 시절에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나라가 가신 부모님으로부터 “ 까불지 말라 .남자는 점잖아야 된다” 라고 훈육을
받고 자라납니다.
그 당시 1960년대나 지금 2020년이나 왜 남자는 까불면 안된지 모르고 있지요 .
남자는
무게가 있고 말이 없어야 한다고 훈육시키는 것이 그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였습니다.
또한 학교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면 역적이나 간첩이 되는
분위기였지요.
남자 아이는
남자답게 진득하고 말이 없고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일상적인 가부장 사회에서 느끼는 유교적 사회 분위기였답니다
그러나
천성을 어디에 가지 않는 법 .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듯이 이 까부는 버릇이 이렇게 이야기를
꾸며 내는 이야기 꾼으로 아마추어 작가로 승화 되어 버렸군요.
한번은
이런 일화도 있었답니다.
미국에서
건너온 미국 야구 감독이 한국 야구 선수에 대하여 야구 설명을 한 다음에 질문을 하라고 이야기 했지요
그러나
한국 야구 선수들은 누구 하난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착한 모범생들이었지요.
그런 일화처럼
한국에서는 선생님께 질문하는 것은 금기 사항입니다. 특히 교실에서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노트에 조용하게 받아 적고 집에 가서 복습해서 시험을 잘 보면 그런 학생이 모범생이고 정답 같은 학교 생활이었지요
2020년 지금도 별 반 다르지 않을까요
요즈음
학교 생활 풍경은 어떤지 모르지만…
지나친
사관학교 같은 입시교육이 국민학교 시절부터 강압적으로 흐르고 있네요.
안타까운
교육 현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학교
시절 써 놓았던 부산 기행문을 여기에다 소개해 봅니다..
그 당시에
썼던 그대로를 적어 보겠습니다.
중학교 1학년 작문 시간에 작문 선생님의 숙제로 인해 만든 문집에서 수록된 유일한 국민학교 부산 여행기 기록물입니다.
‘부산에서
내가 5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형과
누나들과 같이 부산에 가서 놀았다.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있다.
1968년 8월 3일 맑음 아침이었다.
마음에
들뜬 나는 아침밥을 드는둥 마는둥 하고 갈 준비를 차렸다
그때의
기분이야 말로 이루 비길 때 없었다.
시간은
흘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다음 서울역으로 가서 차표를 사고 나서 맹호 열차에 올랐다
약 20분 동안을 기다리니 열차가 발동을 걸면서 천천히 가기 시작 했다.
창문을
보니 하늘 높이 전봇대가 연달아 뒤로 물로 섰다.
약 10분 지난 농토가 보였다.
저 끝없는
농토가 한 눈에 보이니 나의 마음을 더한층 기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시간은
흘렀다. 약 3시간 동안 열차 속에 있으니 그 상쾌한 마음은
없어지고 지루한 마음조차 들었다.
내가 탄
맹호 열차는 굴을 지나 강을 건너 부산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열차에서 내려 부산역을 빠져 나오니 임 장로님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임 장로님께서는
우리들을 임 장로님 댁으로 데려다 주셨다.
그 날은
너무 피곤하여 이불 속으로 직행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송도에 갔다.
그런데
송도에는 물이 어떻게나 더러운지 물에 들어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없다.
수영을
하러 왔으면 의례 물에 들어가기 마련이다.
수영을
하여도 재미가 없었다.
집에 돌아
왔어도 피곤은 가시질 않았다.
다음날은
임 장로님 가족과 함께 해운대에 가서 놀았다.
그런데
놀다가 갑자기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돌아 왔다.
다음 날은
다데포에 가서 놀았다.
다데포는
해운대 만큼 물은 깨끗하지 않지만
썰물 때는 50-60m를 나가면 어떤 곳에는 물이 없는 곳도 있고 물이 있는 곳은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다음 날은
태종대에 갔다.
버스를
타고 벼랑 길을 가는데 무서웠다.
태종대에서는
수영을 하지 않고 놀기만 했다.
출렁이는
바다. 막막한 수평선.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나도 이런 곳에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임 장로님과 함께 동북교회 갔었다.
동북교회는
응암공원 옆에 웅장히 서 있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 교회보다 큰 것 같았다.
저녁에는
은암 공원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구경했다.
다음 날은
부산에서 노는 것이 마지막 날이었다.
그런데
나는 설사가 나서 해운대에 가지 못했다.
집에 누워
있자니 따분하고 신경질이 났다.
다음 날은
우리는 차비를 차린 다음 부산역으로 갔다.
기차 간에서
재미있게 놀은 생각을 하니 더 놀다 갔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할 뿐이었다.’
어린 동심의
마음이 잘 녹아 내리고 있군요
그 당시로써는 가장 먼 지방이었고 하늘엄마에게는 베들레헴 같은 태어난 곳이기도 했습니다..
어언 장년의
한 가운데 서 있는 하늘엄마로써는
회한이 넘치는 동심 어린 여행기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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