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1절 : 하늘 엄마의 집안 이야기
인생 친구를 만나 그 동안의 체험했던 이야기를 뒤풀이 삼아 하나씩 둘씩 회포를 풀어 봅니다.
“우리 집은 평양이야 즉 모란봉과 을 밀대가 있는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동네이지.
흔히들 우리 나라 속담에 ‘자기가 싫은 면 평양감사도 안 한다’는 말이 생겨 날 정도로 누구나 가보고 싶은 색향이기도 해.
그러나 반골의 땅이기도 하지.
역사적으로는 고조선이 있던 땅이고 그 후에 고구려의 수도이기도 하고 고려 때나 조선 시절에는 제2의 수도이기도 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지.
그리고 중국을 향해 저항하는 반골의 정신이 충만한 곳이기도 하지.
지금은 그 방향이 미국으로 향해서 문제가 되긴 하지만…
좌우간 역사적으로 가 볼 한한 땅이야.
그 유명한 한(恨) 많은 대동강이 흐르고 있는 땅이기도 하지
‘모란봉 전차역 첫 번째 집이며 그 곳이 사거리로 100평정도 된다’고 작고하신 아버님께서 말씀 하시곤 하셨지.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꼭 평양 우리 집을 방문해 보라고 유언을 남기고 가셨어.
나 역시 살아 생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세월이 워낙 하수상하니 어떨지 모르지.
내가 못 가면 우리 외동딸에게 꼭 가보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기고 있어.
물론 조카에게도 계속 간혹 이야기를 주입시키고 있어.
나의 집안 역사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자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나의 사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책무 일수도 있다고 생각해.
또 논리적인 비약이겠지만 유태인들처럼 조상들의 고통과 좌절을 알아야 또다시 그런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지.
또 장황해 졌구나.”
“그래 좋아 재미있겠는걸 .
한번 집안의 뿌리부터 내력부터 천천히 재미있게 이야기를 전개 해봐.
서둘지 말고 편안하고 자유스럽게 쉽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교훈을 동반해 가면서…
하늘 엄마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인생 내가 너를 기대하고 있어
그냥 말을 해봐.
자연스럽게”
“우리집안은 큰아버지와 아버지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탱크를 몰고 남침한
6.25 한국 전쟁 동란 중에 평양에서 구사일생으로 피난을 내려 왔어
그 이야기부터 시작 할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집안의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부터 해야 순서겠지…… 자 들어봐 이 이야기는 어머니로부터 어깨 너머로 들어 온 것들이라 조각 정보들을 모자이크 식으로 짜깁기 해서 만들어 낸 이야기야.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아서 종합적으로 상상력을 조금 보태서 이야기를 풀어 볼게.
왜냐하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두 분다 평양에서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평생 본적이 없어 .
단지 아버지와 큰아버지 할머니 초상화가 안방에 있었거든 그래서 상상의 날개를 펴고 할머니를 만나러 가곤 했을 뿐이지..
우리 할아버지는 전설 속의 인물이라 우리 아버지도 얼굴을 모르고 자라나셨어.
아버지도 한(恨) 많은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셨지…
그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질곡의 삶을 겪어야만 했겠지만…
원래 우리 본향은 평양이 아니고 평양에서 동북방향으로 위치에 있는 성천군이야
우리 집안의 할아버지께서는 순사(순경)였다는 말도 있고 식당에 식품재료들을 납품하는 도매상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누구 이야기가 맞는지는 모르고 있어 아니면 둘 다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우리 할아버지께서 무서운 순사(지금의 순경)였다는 이야기는 친일파였다고 몰릴 수 있는 집안의 치욕스러운 이야기 일수도 있어. 그러나 집안의 내력을 미화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가감 없이 전달하고 기술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고 인간 본연의 정신 일수도 있다고 봐.”
“그래 요즈음 자서전들이나 회고록들은 친일파들도 독립군으로 둔갑시키거나 애국자로 미화시켜 회고록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지.
이미지 메이킹을 화장시켜 다른 인물로 미화시키는 짓을 밥 먹듯이 하고 거짓말로 윤색해 무슨 위인이나 되는 것처럼 신화적 인물로 만드는 세태니까…”
“내가 자라면서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우리 친 할머니가 무척이나 여장부이었고 괄괄하셨다고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어.
또한 샤머니즘을 좋아해서 집안에 신상들을 간직하며 아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옛날에는 누구나 잡귀를 내쫓고 부귀 영화를 원했기 때문에 그랬을지 모르지 .
지금도 현대인들의 황금만능주의와 일맥상통하겠지만…
인간들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또한 은밀한 사실중의 하나는 우리 친 할아버지에게 할머니를 후처 자리로 들어 앉혔다고 들었어.
할머니께서는 자식을 5명이나 전 남편으로부터 낳았다는데 어떻게 후처로 다시 재가했는지도 의문이야.
그런데 5명이나 애를 낳고도 어찌해서 후처로 재가를 하셨는지는 미스터리야
그 당시 풍습과 정서로는 일반적인 상식 수준이었는지도 모르지.
좌우간 어떻게 전 처와 자식들이 있는 할아버지와 자식이 5명이나 있는 할머니가 다시 결혼하시겠는지도 궁금해..
평양에서 피난 내려 오신 큰형의 말로는 도매상으로 식당에 식품을 납품하다가 눈이 맞아 결혼하셨다고 그랬어.
그런데 옛날에도 자유스럽게 결혼을 했을까?
그 당시에는 누구나 자녀를 10명정도는 기본으로 낳았으니까..
물론 그 중에서도 많은 애기들이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또한 피임도 할 수 없고 자연 순산을 일반적으로 생각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지…
지금처럼 하나 낳아 기르기도 벅찬 세대와는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그래 지금과 너의 할머니가 사셨던 19세기와는 격세지감(隔世之感)으로 사뭇 모든 정서와 환경이 판이하게 다르겠지.”
“ 만물은 변하는 거야 .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것이 인생이야.
흐르는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고 핵심인 것 같아.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 할머니의 아버지가 고관 대작 부잣집이었다는 전설이 있어 .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가 부잣집 딸이었다는 이야기지.
왜 부잣집 딸이 후처로 들어 갔는지도 미스터리이고
할아버지가 없이 과부의 집안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도 역시 우리 집안에서 회자 되고 있어. 그러니까 할머니
큰아버지 아버지 세 식구가 힘들게 평양에서 사셨다는 거야.”
“옛날에는 그 당시 누구나 후처나
첩을 들이는 것이 상례화 되어 있었던 것이지.”
“그래 그래 첩을 들이는 것이
관행이었나 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할머니의 아버님께서 우리
할아버지를 건달로 취급하며 안 종아 했다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어”
“왜 안 좋아 했는데?”
“이유가 가난해서인지 순사여서인지 혹은 건달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장인(우리 할머님의 아버지)께서 고관 대작이어서 그런지 전혀 추측되는 바가 없어. 단지 정서적인 느낌으로는 남의 집 귀한 딸을 후처나 첩으로 데려 간다는 사실에 기분이 몹시 상하거나 자기의 체면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했겠지..
혹은 그 당시 시대 정서가 후처로 자기 딸을 시집 보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좌우간 사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왜 고관 대작의 딸이 후처로 순사한테 시집갔는지도 이해가 안 되지만…
그러나 할머님께서는 큰아버님과 아버님을 끔찍이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즉 평양에서 돌아가시기 까지 두 아들들을 의지하며 사셨다고 들었어.”
“너는 할머니를 전혀 본 적이 없니?”
“응 나는 전혀 할머니를 본적도 없고 단지 안방 문갑 위에 오롯이 세 식구가 그려진 초상화롤 통해서만 볼 수 있었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척들을 모르고 자랐으니까 친척 개념이 희박했겠네?”
“그래 친척의 족보도 모르고 자랐고 조금 가족간의 정이 옅다는 것을 결혼을 하고 난 후에야 알았어.
. 어릴 적에는 당연히 일상적인 일이라 모르고 지내 왔지.
특히 큰아버님께서는 평양에서 초등학교를 나오셨는데 학교 다닐 때 항상 성적이 우등을 하셔서 상과 함께 많은 칭찬과 애정을 할머님으로부터 독차지 했다는 이야기를 어머님으로부터 듣고 자랐어.
그러나 우리 아버님께서는 안타깝게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셨던 것 같아.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워낙 가난하셔서 둘째 아들은 학교에 못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라고 하셨지.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엄청난 사건이지만 그 당시 풍습으로는 다반사였어.
오히려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만 해도 사치였고 감지덕지로 생각해야 하는 시절이었지.
1920년대의 당시의 눈물겨운 시대상이었지…
사족이지만 사촌 형이 공부를 잘 한 것은 큰 아버님을 닮아서 그런 것이라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곤 했어”
“혹시 평양에서 있었던 비사(秘事)도 많이 있을 텐데 …”
“차차 그런 우리 집안의 비사(秘史)이야기도 할께
마음이 급해지고 웬지 부끄러워지는구나.
과연 우리 집안 이야기를 세상에 공표해야 하나 하고…
왠지 쑥스럽고 부끄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그냥 우리끼리 얘기를 해봤지 인생 너에게까지 이렇게 다 야기하리라고 생각을 유보해 두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
언젠가는 나에게도 나의 인생 여정을 이야기 하고 싶었거든 .
그래서 세상 밖으로 튀어 나가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좀 더 좌절과 고통으로 가득 찬 우리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자기 스스로 만든 창의적인 길을 찾았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상념에서 이야기를 너에게 하는 거야..”
“고마워 나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 줘서..
누구나 저마다의 짐을 지고 인생길을 걸어 갈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겠지..
좀더 지혜롭고 스마트한 삶이 되기를 바랄 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어릴 적부터 많이 놀아보고 많이 책을 읽어 보고 많이 주위 사물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이 서술해보는 것이 좋아.”
“그래 인생 너는 지혜자이며 종결 자이구나.
많이 나에게도 알려줘 너의 지혜와 지식과 삶의 의미를…”
우리 집안의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있다니
아무도 관심이 없는 이야기들이라 또한 자랑스럽지 못한 집안 내력이라서 그런지 다들 덮어 두려고만 하는데...
그냥 마음속 깊이 심연 속으로만 전수하려고 했는데…
물론 누구도 관심을 보이는 않을 수도 잇겠지만…
뜻밖에 네가 관심이 보이다니 단기(單騎)로 싸우다가
백만 원군(百萬援軍)을 만나는 것 같아 흐뭇하기만 해.
아마 10년 전 이나 20년 전 쯤 되었겠나 우리 집안의 역사가 궁금하여 종로에 있는 동대문 시장에서 복덕방 하시는 이복 형님에게 우리 집안 내력에 궁금하여 여쭤 본 적이 있는데 무척 당혹해 하셨으며 그 사건이 아버님 귀에도 들어가 자식이 아버지 뒷조사나 하고 다닌다고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새로워 .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인데 지금도 나의 뇌리에
각인이 되어 있다니…
슬픈 자화상이야..
물론 아버님과 큰 아버님은 후처의 자식이고 이복 형님은 본처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지.
다 커서야 족보 관계도 알게 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조선은 양반제도로 인한 신분제도가 엄연히 존재했고 서자들을 차별하였기에 조선의 정서가 그대로 답습되어 큰아버님이나 아버님이나 이복 형님께서 함구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어릴 적부터 느껴온 아픔이나 고통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으려는 보호 본능이 있는 법이지요.
“할머니 모습이 자못 궁금해 한번 뵙고 싶은데…
어떤 분이셨는지…
손자라 무척 귀여워 해 주셨을 텐데…
그렇게도 큰아들만 애중중지 키우셨고 작은 아들에게는 냉대를 하셨는지…”
이 정도로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습을 대강이나마 스케치해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 아버지와 큰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평양 결혼생활 이야기를 소묘해 보겠습니다..
덧붙임:
혹시 중고생들을 위하여 사전을 찾아 단어의 뜻을 올립니다.
요즈음은 한자를 배우지 않아 생소한 단어인 것 같아서 이렇게 단어풀이를 해 봅니다.
참고하시기를…
색향색향 [色鄕]
- 색향: 미인이 많이 태어나거나 기생이 많은 고을
- 반골 1.권력이나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기개
- 2.쉽게 다른 사람을 따르거나
복종하지 않는 기질
- 구사일생 주로 ‘구사일생으로’의 꼴로
쓰여, 아홉 번 죽을 뻔하다 한 번 살아난다는 뜻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고 겨우 살아남을 이르는 말
황금만능주의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나 태도
- 비사 밖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내지
말아야 할 일 또는 사건
다반사 차 마시는 일이나 밥 먹는 일과 같이, 일상에서 늘 일어나
대수롭지 않은 일
- 감지덕지 1.과분한 듯하여 아주 고맙게 여김
- 2.과분한 듯하여 아주 고맙게
여기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 백만 원군: 백만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전투에서, 자기편의 싸움을 지원한다는 뜻입니다
단기 : 홀로 말 한 필로 싸움을 한다는 뜻입니다.
- 애지중지 매우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 냉대: 정이 없이 차갑게 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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